"AI 작곡 서비스 보고 쓰러질 뻔했어, 빨리 이 판을 떠야지"

[arte] 임희윤의 팝 에포크
인공지능과 만인의 벨에포크
“인공지능(AI)가 발달하면 예술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인간의 창작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며칠 전, 특강을 하기 위해 찾은 한 고등학교 교실. 질문을 위해 손든 학생은 이미 조금 근심 어린 표정이었다. 예술가를 꿈꾼다는 그 학생의 저 진지한 질문에 즉답하기 힘들었다. 생각을 가다듬으며 2, 3초는 뜸을 들여야 했다. 저들이야말로 AI와 함께 숨 쉬며 사는, 첫 세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우린 인간과 살았지만, 저들은 AI와 산다. 저들의 아이는 인간의 아이뿐 아니라 AI라는 아이와도 친구가 돼야 할 것이다.’ 짧은 시간에 여러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어떻게 답했는지는 이 글 끝에….
6월 29일과 30일 서울 송파구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리는 걸그룹 에스파의 콘서트에 매우 특별한 특별 게스트가 출연할 가능성이 높다. ‘3분기 데뷔 예정’인 가수 나이비스(nævis)다. 나이비스는 2020년 11월 에스파가 데뷔할 때부터 스토리와 캐릭터로 존재했다. 현실의 에스파 멤버들을 가상현실 속 거울 멤버들인 ‘아이-에스파(æ-aespa)’와 이어주는 연결자로 설정됐다. 지난해 5월 에스파 미니 3집의 첫 곡인 ‘Welcome To My World (Feat. nævis)’로 처음 곡명에 이름을 올리더니 올 상반기 솔로 데뷔까지 앞뒀었다.

좀 더 완벽한 모습을 갖추기 위해 데뷔 시점은 3분기로 조금 미뤄졌지만 그래서 맛보기로 2분기의 끝자락인 6월에 열리는 에스파 콘서트에 등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SMCU(SM 컬처 유니버스)의 세계관 속에서 마침내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이 무대 위에 구현될지, 그것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현현될지 기대된다.
에스파 2024 라이브 투어 콘서트 포스터(위)와 버추얼 아티스트 '나이비스' 이미지(아래) / 사진 출처: 에스파 트위터/ 한경DB
물론 AI와 인간의 무대 위 만남은 앞으로 그저 단순히 나란히 서서 노래하는 것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최근, ‘GPT-4o(포오)’가 논란에 휩싸이며 영화 <그녀>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GPT-4o’는 챗 GPT를 만든 오픈AI사(社)의 음성 인공지능 서비스. 여기서 출시한 5개 음성 중 하나가 배우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와 닮았다는 평이 나온다. 2013년 영화 <그녀>의 ‘사만다’ 역 말이다. 스파이크 존스가 연출하고 호아킨 피닉스가 주연한 이 영화에 요한슨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지만, 인공지능 비서 사만다 역으로 목소리 연기를 한다. 피닉스가 맡은 테오도르는 결국 극 중 사만다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영화 '그녀'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두 사람, 아니다. 한 명의 사람과 하나의 AI인 테오도르와 사만다. 둘은 에스파와 나이비스처럼 한 무대에 설 수 없다. 사만다는 인공지능과 목소리만 있고 실체만 없는 허깨비이므로... <그녀>에 등장하는 명대사, 명장면 가운데 우리 음악 애호가들의 마음을 울리는 최고의 명대사, 명장면은 그래서 따로 있다. 다음과 같다.

“우리 같이 찍은 사진이 없길래 대신 이 곡을 그냥 사진하자고. 우리 함께하는 이 순간을 담아서...”(사만다)

테오도르는 직접 지은 곡을 우쿨렐레로 연주하고, 이어폰 속 사만다는 거기 즉흥적으로 가사를 붙여 노래한다.난 달에 누워 있다네
내 사랑, 곧 거기로 갈게
여긴 조용하고 별이 많은 곳
우주에 휩쓸려 우린
100만 마일이나 떨어져 있지만’ ‘알고 싶은 게 있어
너에게 숨기고픈 건 없어
어둡고 빛나는 곳이야
하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내 사랑
난 안전하고 우린 100만 마일 떨어져 있다네

후렴이나 변주도 없이 무뚝뚝하게 1절과 2절만 있는 1분 50초짜리 소품이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이 곡, ‘The Moon Song’은 그 울림이 만만찮은지 모른다. 마치 존재할 수 없는 스냅사진처럼, 유령과 함께한 공허한 셀카처럼 이 노래만은 언제까지나 우주공간을 맴돌고 있을 것만 같다.
영화 '그녀'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감성에만 빠져 허우적댈 때가 아니다. 방금 플래시백으로 살펴본 <그녀>의 장면은 다름 아닌 인간과 AI의 합작 과정이다. 휴 그랜트 주연의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이 아니라 ‘그 AI 작사 그 남자 작곡’인 셈. 케이팝 송캠프(song camp·단기 집중 작곡가 협업 캠프)에서 흔히 보는 트랙 메이커(track maker·반주 편곡자)와 톱 라이너(top liner·보컬 멜로디 작곡가)의 분업을 ‘인간+인간’이 아닌 ‘인간+AI’가 해내는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영화 '그녀'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얼마 전, 한 게임음악 시연회에 사회를 보러 갔다가 행사 종료 뒤 작곡·편곡가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는 내게 낯선 인터넷 사이트 주소 하나를 건넸다.

“지금 베타 서비스 중인데 조용히 혼자만 들어가 보세요. 아직 거의 안 알려졌는데요. AI 작곡 서비스. 몇 곡 의뢰해 보고 저 쓰러질 뻔했거든요. 한 1, 2년 바짝 일하고 이 판을 떠야겠어요. 이런 게 상용화하면 저 같은 작곡가들은 정말 할 일이 없을 테니까요.”

반농담처럼 너털웃음을 지었지만, 그의 말을 성문 분석하면 농담은 10% 미만이 될 듯했다.

클래식 음악계는 어떻게 될까. 창작의 영역에서 AI와 인간의 협업은 상상을 뛰어넘는 작품이 나올 수 있을까. 말러의 ‘천인(千人)교향곡’을 넘는 ‘백만인교향곡’, 존 케이지의 4분 33초를 능가하는 ‘-(마이너스) 4분 33초’가 나오지 말란 법 있나.

대형 오케스트라의 미래는? 모르겠다. 지난 3월 두바이에서 제1회 AI영화제가 열렸는데 한국인이 대상을 탔다. 작품명은 <원 모어 펌킨>. 호박 농장을 운영하는 노부부가 어느 날 찾아온 저승사자에게 죽이는 호박죽 식사를 대접하면서 벌어지는 기상천외를 다룬 작품이다. 일체의 카메라, 제작 스태프 없이 무료 생성형 AI만 써서 단 5일 만에 만든 영화다. 관현악 단원들의 해석과 땀의 총합이 ‘배울 만큼 배운’ AI의 섬세한 연주로 대체된다면…?
권한슬 감독의 영화 '원 모어 펌킨'의 한 장면 / 사진 출처: AI영화제 홈페이지 캡처
2007년에 ‘리-퍼포먼스’라는 제목의 기이한 음반이 나왔다. 미국의 소프트웨어 회사 ‘젠프’가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1932∼1982)의 1955년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명연에 대해 연주 특성을 컴퓨터로 분석해 인위적으로 ‘재연’해 녹음한 음반이다. ‘영혼이 없다’는 혹평, 그리고 ‘옛 명연을 고음질로 즐길 수 있게 됐다’는 호평이 당시 엇갈렸다.
글렌 굴드의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젠프 리-퍼포먼스' 앨범 커버 / 사진 출처: 대한음악사 홈페이지 캡처
실연, 작사, 작곡, 편곡…. 음악 창작이나 연주의 모든 영역에서 빠른 시간 내에 AI는 협업이나 분업의 파트너, 또는 하청 업체의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날이 오면, 연주자 가운데서는 자신만의 개성이 강하며 종잡을 수 없는 즉흥성과 상상력을 지닌 아티스트가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아지리라. 지난달 ‘쇼팽: 에튀드’ 음반 발매 간담회 때 임윤찬이 한두 가지 말이 뇌리에 맴돈다.

1: “저같이 평범한 사람은 매일매일 연습하면서 진실하게 사는 게 중요한 것 같다”
2: “어느 날은 나방이 날아다니는 것처럼 치고 싶을 때도 있고, 어느 날은 페달을 10분의 1만 밟으면서 치고 싶을 때도 있다.”

1번의 사람을 ‘휴먼’으로 대체할 때, 2번의 무게감이 더 크게 다가온다. 스페인 마요르카에서 비가 쏟아붓던 날 조르주 상드를 그리며 건반을 더듬던 쇼팽처럼 ‘빗방울 전주곡’의 덥고 시린 감성은 AI가 따라오기에 당분간은 힘에 부치지 않을까.
아차, 서두에 질문한 학생에게 나는 이런 답을 건넸다.“4000만 국민 가운데 영화감독은 100명이 될까 말까였던 시대. 그것이 지나고 AI의 힘을 빌려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오면 4000만 명 중 2000만 명이 영화감독이 되는 날이 도래하면 중요해지는 것? 영상을 찍는 기술이 아니겠죠. 질문하는 능력,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능력 아닐까요. 그리고 누구나 예술을 하는 시대는 두려운 미래, 끔찍한 디스토피아가 아니에요. 특별한 재능이나 환경이 뒷받침된 극소수만이 예술 창작을 독과점하던 구시대와 영영 작별하는, 진짜 예술의 파라다이스(또는 벨에포크)가 올지도 모르니까요.”

임희윤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