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 없는 삶이 어디 있겠나, 함께 가자 <찬란한 내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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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허남웅의 씨네마틱 유로버스난니 모레티 감독은 영화 (만들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며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작품을 종종 만들어왔다. 대표적인 작품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나의 즐거운 일기>(1993)이다. 난니 모레티 본인이 스쿠터를 타고 이탈리아 전역을 누비는 이 로드무비는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 ‘베스파’에서 사람을 죽이고 난자하는 공포영화가 호평받는 현실에 현대영화는 죽었다며 개탄했다. 그러면서 이탈리아의 위대한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8과 1/2>, <달콤한 인생>)와 피에로 파올로 파졸리니(<샬로, 소돔의 120일>, <마태복음>) 등을 언급하며 과거 영화로 회귀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의견을 전달했다. 영화의 유산을 통해 ‘찬란한 내일로’ 나아가자는 의미랄까.
난니 모레티
함께할 수 있다면 내일로 나아갈 수 있다
공교롭게도 난니 모레티의 신작 제목은 <찬란한 내일로>(2023)이다. 이번 영화에도 난니 모레티가 직접 출연하고 극 중 감독으로 나와 부수고, 때리고, 죽이고, 쏴대는 현대영화의 트렌드에 여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며 ‘마이 웨이 My way’ 자신만의 영화 만들기로 영화의 위기인 시대를 돌파하려 한다. 조반니(난니 모레티)는 5년 만의 신작을 찍고 있다. 내용은 이탈리아 공산당 초청으로 이탈리아의 시골 마을에 공연을 하러 온 헝가리의 서커스단이다. 마을 사람들은 서커스 공연을 볼 생각에 기대가 양 볼에 사탕 물은 아이처럼 부풀어 올랐지만, 공연을 앞두고 문제가 생긴다. 러시아에 맞선 자유화 운동이 헝가리에서 벌어지면서 이에 연대하고자 서커스 단원들이 해당일에 공연을 미뤘다. 과연 이런 내용의 영화를 누가 볼까 싶다. 슈퍼히어로 영화와 OTT 콘텐츠가 대세인 지금 안 그래도 조반니의 영화는 촬영 중 모자란 제작비를 투자받지 못해 중단될 위기에 처한다. 조반니는 프로듀서로 참여한 아내 파올라(마거리타 부이)를 향해 투자자가 영화에 관한 안목이 없다고 어쩌고, 넷플릭스가 요즘 영화를 죽이고 있다고 저쩌고, 폭발 직전 상태로 이런저런 불만을 쏟아낸다.
파올라는 모아이 석상마냥 남편의 비위를 맞추고 달래던 중 예전부터 생각해 오던 이혼을 결심한다. 세상은 변하고 그에 맞춰 관계도 재조정해야 하는데 조반니는 여전한 영화에 대한 고집에, 가족보다 영화를 더 우선순위로 두고 있는 태도에 그만 지쳐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끝이 있으면 시작이 있고, 어두운 어둠 끝에 해는 떠오르고,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오듯, 절망은 있어도 포기는 없다. 영화 현장에서는 완성을 위협하는 문제들이 연이어 터지고, 아내의 이혼 선언에, 이제 20대 중반의 딸은 60대에 가까운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하고, 조반니를 둘러싼 환경은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다. 긴 터널과 같은 어둠이 지배하는 일상일지라도 <찬란한 내일로>의 톤은 상영 내내 밝고 유쾌한 기운으로 예상하지 못한 빛을 여름 햇살처럼 뿌려 대며 전복의 재미를 선사한다.
별안간 나오는 뮤지컬 씬이 대표적인 예인데, 조반니가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축구공으로 드리블하며 흥얼거리는 노래는 스탭으로 참여한 이들이 가세하면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투로 강한 긍정의 마인드를 드러낸다. 뮤지컬의 기능이란 게 그렇다. 모든 게 끝난 듯한 상황에서 극적인 반전처럼 분위기를 역전하는 기운으로 해피엔딩의 초석을 마련한다.
누군가는 원하는 미래를 향한 일 보 후퇴 후 이 보 전진과 같은 일종의 타협으로 내일을 꿈꾸기도 한다. 난니 모레티는, 그의 분신이랄 수 있는 조반니는 오랜 연출 경력으로 얻은 경험의 지혜인 듯 하고자 하는 것을 돈과 시간의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묵묵히 해나간다면 언젠가 찬란한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 거라는 낙관주의로 힘든 상황과 시기를 이겨낸다. 여기에는 장점과 단점이 존재해서 후자의 경우, 아내 파올로에게는 대책 없는 성격으로, 함께 영화를 만드는 동료들에게는 자기의 예술관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기주의로 비출 수 있어도 중요한 사실이 있다. 영화음악가로 활동하는 딸이 자기 능력을 펼칠 수 있게 지금껏 잘 보살피는 아빠로, 이탈리아에서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이름난 감독으로 조반니에게 주어진 정체성의 역할을 잘 해왔다는 사실이다. 영화를 완성하지 못하면 뭐 어떤가. 조반니와 함께한 두 배우는 촬영 중에 연인으로 발전했다. 조반니의 영화가 매개가 된 결실이다. 아내와의 관계는 또 어떤가. 이견을 좁히지 못하더라도 조반니는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거라는 걸 예측할 수 있다. 시련 없는 삶이 어디 있으며, 위기 없는 영화 만들기가 어디 가당키나 한 것인가. 이런 내용으로 영화로 만든 난니 모레티는 그의 작품을 찾는 관객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찬란한 내일로>의 촬영에 임했다.
시대는 변했을지 몰라도 영화를 만드는 감독과 관객 간에, 삶을 공유하는 가족 간에 지켜야 할 가치는 시간에 영향받지 않는다. <찬란한 내일로>의 마지막은 이 영화의 배우와 스태프는 물론 난니 모레티와 친분이 있는 인사들이 총출동해 행진하는 모습에 할애된다. 함께의 가치를 공유하기에 찬란한 내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허남웅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