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해운대에서 향유고래를 만나다

[arte] 김상우의 아주 사적인 연극일기

제21회 부산국제연극제 개막작 인형극 '모비 딕' 리뷰
인형극을 좋아한다. 특히 마리오네트 인형극을 좋아하는데 어릴 때는 ‘사운드 오브 뮤직’ 에서 줄리 앤드루스와 아이들이 함께 인형으로 공연하는 장면을 좋아했다. 결정적으로는 2000년에 개봉한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에 나오는 마리오네트를 보고 반했다. 생명 없는 인형들이 조종에 따라 숨을 얻은 듯 움직이고 거기에 투영된 감정들이 내게도 전해지는 신기한 경험에 매혹되었다. 그 후로 아시테지 축제(아동청소년 공연예술축제)에 나온 인형극을 찾아가 아이들 사이에 앉아 관람을 하기도 했고, 특히 대형 인형을 쓰는 '예술무대 산'의 무대는 꼭 찾아갔다. '어른들을 위한 인형극'을 표방하는 그 극단은 많은 작품을 내놓진 않지만 매우 완성도 높고 울림 있는 작품을 창작한다. '로미오와 줄리엣', '달래 이야기','손 없는 색시','그의 하루', '산초와 돈키호테' 등은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는다.
연극 '모비 딕' 공연 장면
이번 21회 부산국제연극제의 개막작은 프랑스, 노르웨이, 스페인, 캐나나 등의 다국적 극단 '플렉서스 플레어(Plexus Polaire)'의 인형극 '모비 딕'이었다. 알다시피 허먼 멜빌의 소설이 원작이며 거대한 향유고래에게 한쪽 다리를 잃은 에이허브 선장이 복수를 위해 고래 ‘모비 딕’을 추적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무대는 바다가 되어야 하며 사람은 물론 고래도 등장해야 한다. 이것을 과연 인형극으로 제대로 구현할지 기대를 안고 부산으로 향했다. 1주일 남짓 국제연극제가 열리는 해운대 영화의 전당은 초청 연극 작품 외에도 서커스 등 각종 거리공연과 부대 프로그램들로 들뜬 분위기였다. 이번 '모비 딕'에서 에이허브 선장 역에는 사람보다 큰 대형 인형과 실물 크기의 인형을 번갈아 썼는데 검은 옷을 입은 배우들이 뒤에서 인형을 안고 조종한다. 피퀘드호 선원들의 인형들도 등장하고 어느 장면에선 실제 배우들이 연기를 펼치는데 가끔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사람인지 인형인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대사에 따라 인형의 입모양마저 정확히 움직이니 더욱 그렇다.
연극 '모비 딕' 공연 장면
유일하게 이 작품의 화자인 이슈마엘은 한국인 배우가 연기했다. 이슈마엘이 직접 전달하는 상황과 인물 설명은 아무래도 인형으로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어느 나라를 가든 이슈마엘은 그 나라의 배우를 쓰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초보 선원 이슈마엘은 소설에서 복수의 광기에 사로잡혀 선원들을 위기에 몰아넣는 에이허브에 반해 시종일관 거리를 둔 관찰자로서 작품의 밸런스를 유지한다. 그는 야만인 작살잡이 선원 퀴케그의 유일한 친구가 되기도 한다. 이슈마엘은 고래로 상징되는 대자연과 그것을 정복하려는 인간, 문명과 비문명, 물질과 야만 사이의 중간자이며 어쩌면 멜빌은 그를 통해 당시 서구의 견고한 기독교와 정복의 문화에서 한발 비껴나는 중용의 태도를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아닌가 싶다.
연극 '모비 딕' 공연 장면
다시 인형극으로 돌아와 이 작품은 여러 개의 마리오네뜨를 정교하게 움직이는 것은 물론 무대에 다양한 오브제를 활용한 영리한 연출로 여러 효과를 냈다. 어두운 무대에서 고래 인형들이 물을 뿜으며 평화롭게 유영하는가 하면 순식간에 커다란 천을 무대에 걸고 그 위로 영상을 쏘아 격랑과 다채로운 바닷속을 나타내기도 한다. 마침내 조우한 모비 딕은 선박 피쿼드호를 박살내고 이슈마엘을 제외한 선원들은 모두 목숨을 잃는다. 바다는 다시 평화를 되찾고 선장이 죽든 말든 알 바 없는 고래 모비 딕이 어마어마한 몸집을 드러내며 등장해 눈을 꿈뻑이면서 유유히 객석 앞을 지나쳐 가는데 이것은 영상효과이지만 무대를 꽉 채우는 고래의 압도감이 실로 대단했다. 사람과 인형, 인형과 영상이 뒤섞인 이 작품은 서로 다른 요소들을 융합해 시너지를 낸 좋은 공연의 사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연극 '모비 딕' 공연 장면
포경선 피퀘드호에는 1등 항해서 '스타벅'도 탑승해 있었다. 우리가 매일 마시는 커피 브랜드 '스타벅스'의 네이밍으로 후세에 이름을 널리 알린 그는 에이허브 선장과 달리 매우 이성적인 사람이다. 스타벅은 이야기한다. 시련을 떠나보낼 줄 알아야 한다고. "말 못하는 짐승에게 복수라니요. 그 고래는 단지 맹목적인 본능으로 공격했을 뿐인데. 이건 미친 짓이에요." 인생을 이 인형극에 비유하자면 나는 지금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 어리석은 에이허브인가, 합리적인 스타벅인가. 저녁 무렵 찾아간 해운대에서 나는 저 바닷속 어딘가 있을 고래를 상상하며 먼 수평선 언저리를 눈으로 더듬었다.
연극 '모비 딕' 공연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