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lock 굿 luck…'금고지기 모녀' 고객 마음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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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 승계기업을 가다
(2) 선일금고제작
스마트 열어젖힌 딸편
편견을 걸어잠근 엄마
기술 장인 故 김용호 회장
'금고 화형식'에도 내부 멀쩡
내화금고로 호주·美 수출
정부청사·군사령부도 찾아
가구 금고시대 연 김영숙 대표
남편 사고로 사업 물려받아
공대 출신 딸과 의기투합
클림트·고흐 명화 입혀 히트

조선 제일의 ‘금고 박사’가 설립


김 회장은 사세를 넓히기 위해 1996년 접경 지역인 고향 경기 파주시 월롱면 일대에 대규모 공장을 지었다. 김 회장은 파주 공장을 발판으로 1999년 미국 UL 인증에 이어 2002년 스웨덴 품질 규격 인증(SP), 러시아 규격인증(GHOST) 등 내화금고와 관련한 세계 3대 인증을 모두 따냈다. 수입 금고에 의존하던 국립중앙박물관, 정부종합청사, 육군·해병대 사령부 등 공공기관은 물론 기업은행 산업은행 농협 등이 점차 선일금고를 찾기 시작했다.
투박한 금고에 여성 감성 입혀
28일 파주 본사에서 만난 김 대표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남편의 사고로 충격이 컸던 데다 해외 거래처에 선일금고가 곧 문을 닫을 것이라는 소문까지 퍼져 고민과 갈등이 많았다”며 “하지만 금고밖에 모르던 분의 사업을 접는 건 죄를 짓는 일인 것 같아 마음을 다잡았다”고 했다. 2001년 입사해 승계를 준비하던 김 대표의 장녀 김은영 부사장도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김 부사장은 ‘제조업은 현장경영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부친의 뜻에 따라 공대를 졸업한 터였다.
최고경영자로 올라선 김 대표는 거친 제조 공정에 여성 특유의 감성을 입히기 시작했다. 그는 “여자가 금고를 만들면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김 대표는 제2의 창업이라는 각오로 시대에 맞는 제품 개발에 들어갔다. 2008년 출시된 인테리어 디자인 금고 브랜드 루셀이 그 결과물이다.사무용 금고 일색이던 금고 시장은 루셀의 등장 이후 가정용 시대로 진입했다. 금고 전면은 투박한 단색 철판에서 고흐의 ‘해바라기’, 클림트의 ‘키스’ 등 명화와 다양한 디자인 패턴을 입혔다. 금고업계 최초로 2009년 현대백화점에 입점, 3개월 만에 300대가 팔려나갈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금고도 가구’라는 인식의 패러다임 전환이 먹혀든 셈이다. 이 같은 판로 혁신에 힘입어 2000년대 초반 70억원을 밑돌던 매출은 이 무렵 180억원으로 두 배 이상으로 뛰었다.
디자인 혁신으로 금고 대중화에 성공한 선일금고는 여세를 몰아 김 부사장 주도로 스마트 혁신에 나섰다. 2015년 SK텔레콤과 함께 세계 최초로 사물인터넷(IoT) 금고 개발에 뛰어들었다. 선일금고는 이후 LG유플러스 KT 등과 제휴해 국내 금고 제조회사 중 유일하게 통신3사의 서비스와 결합한 IoT 스마트 금고를 출시했다. 금고의 이상 상태를 감지하면 자동 알람이 울리는 보안 기능을 적용했다.
혁신경영 거듭하는 ‘독수리 모녀’
김 부사장은 가구시장으로 진입한 금고의 영역을 더 넓혀 가전제품 시장으로 확장 중이다. 선일금고가 역점적으로 내세우는 ‘보안 가전’ 분야다. 카메라 센서를 부착했거나 명품 스피커 하만카돈 제품이 달린 프리미엄 금고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해엔 또 다른 브랜드 메타셀을 출시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혁신의 일환으로 페인트 공정(도장)과 용접이 필요 없는 친환경 공법으로 만든 제품이다. 하반기엔 1인 가구를 겨냥한 빨간 돼지저금통 콘셉트의 미니 금고도 선보일 계획이다. 김 부사장은 “CCTV가 없어도 소중한 물건을 지키고 블루투스 기능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복합기능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신시장을 개척하는 김 대표와 김 부사장의 공격적 행보로 인해 붙은 별명은 ‘독수리 모녀’다. 척박한 제조업에서 보기 드문 모녀 경영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김 대표는 “선일금고가 손녀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작지만 강하고 건강한 100년 기업의 발판을 닦고 싶다”고 강조했다. 제조업의 승계와 관련해 김 부사장은 “산업현장의 흐름이 급격하게 빨라지고 있는 만큼 설비가 낙후된 제조업체들이 현장 설비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도록 정부 지원을 확대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파주=이정선 중기선임기자 leewa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