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승리"…미국에서 족쇄 풀리는 '크립토' [한경 코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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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 구독신청 hankyung.com/newsletter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이더리움 현물 상장지수펀드(ETF)를 전격 승인했다. 지난 수년간 미국은 크립토(가상자산) 산업에 대해 금지와 고발 위주의 강력한 규제 정책을 펼쳐왔으며, 이에 따라 이더리움 상장지수펀드 신청 또한 5월 승인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이더리움 상장지수펀드 승인뿐 아니라, 미국 내 가상자산 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칠 큰 변화들이 도처에서 관찰되고 있다. 11월에 있을 대통령 및 중간선거를 앞두고 일어나는 미국의 이러한 변화들은 그간 억눌려 왔던 미국 내 크립토 산업의 부흥은 물론, 글로벌 단위의 크립토 생태계에도 큰 파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미국 의회가 움직인다
변화의 시작은 1월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승인이었다. 여러 번 반려된 비트코인 현물 ETF는 블랙록 등 민주당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발행사가 참가하자 5명 위원(commissioner) 중 겐슬러 의장이 반대에서 찬성으로 돌아서며 극적으로 승인되었다.그리고 최근 미국 의회는 크립토 산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러 법안을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시키고 있다. 'H J Res.109 법안'은 금융기관 등의 크립토 자산 보유 및 거래에 큰 부담이 되는 '수탁의무 회계지침(SAB121)'을 무효화하는 내용으로, 지난 8일 찬성 228 대 반대 182로 하원을 통과한 데 이어 16일 상원도 찬성 60 대 38로 통과했다.지난 15일에는 이더리움 현물 ETF에 대한 거래소 규칙 변경 신청서 승인도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양당 의원들이 승인을 강력히 촉구한 서한의 힘이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최종 승인되어 거래가 시작되기 전까지 증권신고서 서식 승인 절차가 남아 있지만, SEC가 승인을 반려할 명분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코인베이스의 최고법무책임자(CLO)인 폴 그레왈은 이를 두고 "이더리움은, 우리가 항상 알고 있던 것처럼, 사실상 상품(commodity)으로 간주했다"고 평했다.
'21세기 금융혁신법안(FIT21)'도 23일 새벽 찬성 279 대 반대 136이라는 큰 표차로 하원을 통과했다. 이 법안은 △가상자산 관련 규제 의무를 SEC와 CFTC에 나눌 것 △탈중앙화 테스트를 통해 토큰이 증권인지 아닌지 판단할 것 △크립토 증권은 SEC가, 크립토 상품(commodities)은 CFTC가 관할할 것 △크립토 토큰이 탈중앙화되어 상품(commodities)이 되는 시간을 허락할 것(세이프 하버 조항과 유사) 등이 포함됐다. 수년간 SEC '미등록 증권' 관련 혐의로 크립토 기업들을 압박한 것에 대한 카운터펀치로 작용할 것이다. 이에 화답하듯 코인베이스는 그간 SEC의 소송으로 인해 거래를 중지했던 리플(XRP)의 뉴욕주 내 거래를 당일 재개했다.미국 하원은 같은 날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 반 감시법'으로 불리는 H R 5403 찬성 216 대 반대 192로 통과시켰다. 패트릭 맥헨리 하원 금융서비스위원장은 표결 전 "선출되지 않은 관료가 미국인의 금융 프라이버시 권리를 해칠 수 있는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를 발행하는 것을 막는 법안"이라며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 발행에 대해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이는 미국의 가치를 반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발언으로 2022년 바이든 행정부가 발동한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 관련 행정명령에 제동을 거는 법안임을 분명히 했다.
어떤 배경인가
미국 의회의 최근 움직임의 배경에는 올해 11월로 예정된 미국 대선과 여러 주의 상·하원 선거가 있다. 블록체인 업계 사람들이 합법적인 채널로 쌓아 올린 여러 가지 노력으로 인해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 의원들도 하나둘씩 크립토에 대한 강경한 매파적 스탠스를 버리는 모습이 관찰되고 있다.겐슬러의 SEC와 바이든 행정부, 그리고 민주당은 그동안 크립토 산업에 대해 매우 강경한 태도를 취해 왔다. 사기꾼을 잡아 처벌하는 등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코인베이스나 크라켄 등 건전하고 합법적인 기업들에 대한 억지 소송도 많았다. 이에 대해 불명확한 규제를 억지로 집행한다는 불만 또한 많았다.지난 3월 SEC가 코인베이스에 '미등록 증권' 혐의 기소 전 웰스 노티스를 발부했을 때, 코인베이스는 "SEC에 미국인을 위한 합리적인 크립토 규정을 요청했다. 법적 위협이 돌아왔다"라는 제목의 글을 게시하며 "우리는 우리의 자산과 서비스의 적법성을 확신하며, 필요하다면 우리가 주장해 온 명확성을 제공하고 디지털 자산에 대한 SEC의 관여가 공정하거나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법적 절차를 환영한다"라고 항변했다.
민주당의 반-크립토(anti-crypto) 움직임의 중심에는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이 있다. 워런 의원은 "반-크립토 군단(Anti-crypto Army)"을 천명하며, 크립토를 이란이나 북한 등의 무기 개발, 자금 세탁, 범죄 등에 연관시키고 금융 시스템에 대한 위험으로 간주하는 등 강경한 발언을 이어 왔다. 이러한 배경 속에 바이든 대통령의 친 크립토 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 예고도 빈번하게 이뤄져 왔다.
그런데 올해 11월 대선을 앞두고 변수가 생겼다.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친 크립토(pro-crypto) 메시지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현직 대통령 시절에는 크립토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던 트럼프가 대선을 앞두고 다른 방향성을 보이는 데에 논란이 있지만, 그의 전략은 효과를 내고 있다.
트럼프는 최근 바이든 대통령과 겐슬러 위원장, 민주당 등을 비판하며, 크립토로 후원금을 받겠다고 선언하고 "친 크립토 군단(Pro-crypto Army)"을 만들자고 호소했다. 특히 지난 26일 연설에서 "5000만 크립토 보유자들에게 자기 수탁(self-custody)을 지원"하고 "워런과 그 무리를 쫓아낼 것"이라고 밝히는 등 발언 수위를 점점 높여 가고 있다.
민주당과 워런 의원, 그리고 SEC가 언제부터 왜 크립토를 악마화하기 시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테라·루나 사태와 에프티엑스 파산사태 이전부터 민주당은 크립토를 멀리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민주당의 반 크립토 강경 정책들이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에 부담으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이에 따라 상·하원 양원에서도 민주당에서 친 크립토 표결이 나오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친 크립토 법안 통과의 진정한 의미
원래 블록체인 혁신은 미국이 시작이었다. 비트코인을 창시한 나카모토 사토시의 정체는 알 수 없지만, 비트코인의 초기 기여자들은 미국의 과학자 및 엔지니어들이었다. 할 피니, 닉 사보, 웨이 다이 등이 그 예다. 그런 미국에서 크립토 업계 초창기 초기코인판매(ICO)를 통한 여러 혁신적인 프로젝트가 시작되려 했지만, 트럼프와 바이든 정부 하 규제 불명확성과 SEC의 '증권성' 관련 고소·고발은 현실적인 위협이 되어 산업 발전을 크게 저해했다.잘 알려진 소위 '리플 소송'은 미국 내에서 합법적으로 크립토 사업을 하는 것이 얼마나 불안한 일인지를 만천하에 보여 줬다. 그로 인해 많은 미국 업체들이 사업을 포기하거나 역외로 근거지를 옮겼다. 스택스(STX)를 발행한 구 블록스택 사도 처음에는 증권신고서를 발행하고 스택스 토큰을 만들어 배포했으나, 규제 불명확성 때문에 증권신고서를 철회하고 법인을 공익법인(Public Benefit Corporation, PBC)으로 전환하는 등 몸살을 앓았다.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미국 정치권이 합리적이고 명확한 규제를 마련해 크립토 산업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려는 의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미국 내 크립토 관련 규제 불명확성이 줄어든다는 것은 곧 미국 내 크립토 관련 혁신들이 다시 시작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는 것과 같다. 역외 발행이나 익명 발행 등 규제의 사각지대를 불가피하게 사용하던 기업들도 합법적으로 설 자리가 생기는 것이고, 무엇보다 금융기관이나 대기업들도 당당하게 크립토 사업을 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생기는 것이다. 입법이 완료되기 전이므로 아직 희망에 불과할 수 있으나, 합리적인 규제를 충실히 준수하는 합법적인 사업체를 통해 혁신을 이루려는 미국 내 크립토 업계 사람들의 오랜 소망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국제적인 영향
유럽연합(EU), 일본, 싱가포르, 홍콩 등 크립토 선진국들은 수년 전부터 산업 육성과 진흥을 위해 자체적인 법안을 준비하고 여러 제도를 시행 중이지만, 다른 여러 국가는 미국 SEC와 그 영향 아래 있는 IOCSO(국제증권위원회기구)의 동향을 관찰해 오며 과거 미국의 금지 일변도 정책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미국은 정책 방향의 급선회로 유럽연합이나 일본과 함께 혁신의 기회를 포착하고 국익 신장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수년간 물밑에서 크립토 업계와 함께 논의를 거듭해 온 결과, 그리고 선거를 앞두고 민심을 반영하여 빠른 변신이 가능했던 것이다.
미국에서 크립토 산업에 족쇄가 풀리면 크립토 기술과 산업, 서비스와 재화는 범죄 도구가 아닌 혁신이자 미래가 될 것이다. 미국과 크립토 선진국에서 합법적으로 개발된 금융의 혁신들이 거대자본을 등에 업고 속속 출시될 것이다. 크립토엔 국경이 없고, 유튜브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처럼 금융마저 미국 크립토 기업들이 전 세계를 장악하게 될 수 있다. SEC의 과거 정책을 답습하던 국가들은 이 사태를 엄중하게 받아들이고 기민하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김민승 코빗 리서치센터장은...▶이 글은 암호화폐 투자 뉴스레터 구독자를 대상으로 다양한 관점을 제공하기 위해 소개한 외부 필진 칼럼이며 한국경제신문의 입장이 아닙니다.
코빗 리서치센터 설립 멤버이자 센터장을 맡고 있다. 블록체인과 가상자산 생태계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사건과 개념을 쉽게 풀어 알리고,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도록 돕는 일을 한다. 블록체인 프로젝트 전략 기획, 소프트웨어 개발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