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로그아웃' 부르는 최고 탐정극, 콜린 파렐의 '슈거'

[arte] 오동진의 아웃 오브 넷플릭스

애플TV+ 8부작 ‘슈거’
전설의 탐정 필립 말로우의 현대판 패션
OTT 최고 걸작 드라마 반열에 오를 애플TV+의 8부작 ‘슈거’는 탐정극이다. 사립 탐정 이름이 슈거(콜린 파렐)이며 풀 네임은 존 스티븐 슈거이다. 항상 깔끔한 수트 차림이고 총을 갖고 다니지 않으며 웬만해서는 폭력을 쓰지 않는다. 물론 극 후반으로 가면서 그 역시 정당방위 차원에서 어쩔 수 없이 총을 쓰게는 된다. 그때 그는 크게 다치는데, 회복하는 아주 잠깐 평상복을 걸친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는 화이트 칼라 와이셔츠에 단색 넥타이를 하고 커프스까지 한다. 그 옛날 전설의 탐정 필립 말로우(레이먼드 챈들러가 창조한 캐릭터)나 샘 스페이드(대쉴 해밋이 창조한 탐정)가 늘 중절모에 정장 차림으로 다녔던 것의 현대판 패션인 셈이다.
드라마 '슈거' 속 콜린 파렐 / 사진. ⓒApple TV+
탐정 슈거를 알게된 옛날 여자, 록커이자 한때 ‘약쟁이’에 알코올 중독자였던 멜라니 매슈스(에이미 라이언)는 그가 ‘비밀이 많은 것’같아 매혹당한다. 잘생기거나, 돈이 많거나, 영리하거나, 잠자리 기술이 좋아 보이거나 등등 때문이 아니다.
탐정 슈거는 멜라니의 전 남편이자 영화 제작자인 버니 시걸(데니스 부치카리스)이 영화배우 레이첼 케이(나탈리 알린 린드)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올리비아(시드니 챈들러)를 찾고 있다.
올리비아는 실종됐다. 아버지인 버니는 그녀가 어디선가 약에 취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할아버지 조너던 시걸(제임스 크롬웰)의 생각은 다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조너던 시걸은 할리우드의 전설적 제작자이며 그의 아들 버니는 그보다 못한 2류 제작자(그의 사무실에는 액션영화 ‘익스펜더블’ 포스터가 보인다)이고 또 그의 아들의 아들, 곧 손자인 데이비드는 한때 데이비라는 극 중 이름으로 인기를 얻었던 아역배우 출신의 망나니 데이비드(네이트 코드리)이다.
드라마 '슈거' 속 에이미 라이언ㅣ사진. ⓒApple TV+
조너던의 아들이자 사라진 올리비아의 아버지, 곧 이 시걸 집안의 2대인 남자 버니의 여자는 전부 4명이었다. 첫 번째가 마깃 소렌슨(안나 귄)이고 그녀와의 사이에 바로 아들 데이비드가 있는 것이고 두 번째가 주요 인물인 멜라니이며, 세 번째가 올리비아의 친모 레이첼이다. 그리고 지금은 아시안 계 여성(엘리자베스 아뉘스)과 살고 있다. 이 관계를 다 아는 건, 언뜻 다소 불필요해 보이지만 나름 이 드라마 전체의 윤곽을 파악하는 데 있어 중요하다. 늘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인물의 가계(家系)도가 중요하다.
드라마 '슈거'의 한 장면 / 사진. ⓒApple TV+
사건을 의뢰한 것은 올리비아의 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인 조너던 시걸이다. 시걸 가문의 지배자인 그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권력자이지만 자신의 손녀를 끔찍이 아끼는 사람이고 시걸 가문을 스캔들에서 보호하는 장막의 인간이다. 그는 가능한 대중 앞에 자신의 가문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 왔다. 그런 그가 실종자를 찾는 데 있어 귀재라고 소문난 인물이자, 무엇보다 일 처리가 깔끔하고 비밀을 잘 지키는 탐정 존 슈거를 소환한다.

조너던 시걸이 존 슈거를 만나는 모습은 지금까지 할리우드가 탐정 영화나 그 비슷한 장르물에서 사용해 왔던 수많은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탐정물 중 유명한 영화들 대부분이 누군가를 찾아 달라는 얘기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단순해 보이던 그 실종사건은 곧 어마어마한 사건, 폭행과 살인으로 이어진다. 더욱 심각한 것은 대체로 그 모든 음모가 한 집안의 비극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보다 더 가관인 것은 그 집안의 일원이 범행의 배후이거나 최소한 공모자일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드라마 '슈거'의 한 장면 / 사진. ⓒApple TV+
위대한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아동 성추행으로 영화계에서 퇴출당한 로만 폴란스키의 걸작 ‘차이나 타운’(1974)에서도 그렇다. 멀레이(페이 더너웨이)라는 여자는 주인공 탐정(잭 니콜슨)을 찾아와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며 그 상대 여자, 곧 정부(情婦)를 찾아 불륜을 폭로하게 해 달라는 얘기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 치정사건은 결국 LA 수도 및 토건 사업에 얽힌 여자의 아버지이자 부호 사업가의 끔찍한 가족사로 귀결된다.

로버트 벤튼이라는 희대의 시나리오 작가 출신(‘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감독이 만든 ‘트와이라잇’(1998)도 퇴락한 사립 탐정 해리(폴 뉴먼)가 은막의 스타였던 잭과 캐서린 부부(진 해크만, 수잔 서랜든)의 딸(리즈 위더스푼)을 찾는다는 얘기이다.

스티그 라르손의 원작을 데이빗 핀처가 만든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2012)에서 탐사보도 전문기자 미카엘(다니엘 크레이그)은 재벌 헨리크(크리스토퍼 플러머)로부터 오래전 실종된 질손녀(조카 손녀, 형의 손녀)를 찾아 달라는 사건을 의뢰 받았다가 실로 끔찍한 악의 실체를 밝혀낸다.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차이나 타운' · 로버트 벤튼의 영화 '트와이라잇' · 데이빗 핀처의 영화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스틸컷(위에서부터 차례로)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그러니까 애플TV+의 8부자 드라마 ‘슈거’는 이들 작품의 앞과 뒤의 설정을 가져오되, 그걸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하고 재배치했으며 정말 남다르게, 진심으로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의 설정으로 재창조해 냈다.

이 드라마의 뒷부분은 혀를 내두르게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어쩌면 전통과 모던이 만나는 극적인 지점이라는 생각까지 갖게 만든다.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하게 됐고, 또 어떻게 이런 상상의 이야기를 허용하게 됐을까. 할리우드가 지닌 무한대의 창의성, 그걸 보장하는 제작 풍토가 새삼 놀라울 지경이다.

이번 드라마의 쇼 러너 감독(전반부 회차만 연출하고 나머지를 총괄 기획하는 프로듀서)인 페르난도 메이렐레스(‘눈 먼 자들의 도시’ ‘콘스탄틴 가드너’ 등)의 메시지는 분명해 보인다. 옛날, 그러니까 사립 탐정 영화가 쏟아져 나왔던 1940년대 필름 누아르 시절과 달리 인간(탐정)이 인간(의뢰인)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시대에서 궁극의 인간 구원의 문제는 결국 발상의 전환을 이룰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의 결론은 그래서 충격적이다.
드라마 '슈거' 포스터 / ⓒApple TV+
필름 누아르 시대에 대한 오마주(homage)가 넘쳐 나는 만큼 8부작 내내 당시 영화들의 필름 푸티지(자료 화면)가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탐정 에이전트인 극중 인물 루비(커비)는 존 슈거에게 "이제는 총을 갖고 다니라"며 "당신이 좋아하는 글렌 포드의 총을 똑같이 주문 제작한 것이다"고 말하는 장면에선 어김없이 ‘빅 히트’(1953)의 영화 장면이 사용된다.
이건 참으로 의미심장한데 옛날 영화 ‘빅 히트’에서 글렌 포드가 맡은 경찰 데이브는 자신이 수사하게 된 한 여인의 살인사건을 놓고 경찰서장과 국장으로부터 제지받는다. ‘슈거’에서도 주인공 존 슈거는 올리비아를 더 이상 찾아다니지 말라는 압력을 사방에서 받는다. 고전영화의 이야기와 댓구를 이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푸티지를 사용한 셈이다.
영화 '빅 히트' 포스터(위)와 스틸컷(아래)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다음영화
자신의 조력자인 루비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느껴질 때는 1947년의 흑백 영화 ‘과거로부터’가 나온다. 이 영화에서 애인이라고 생각한 앤(버지니아 휴스톤)이 한때 사립 탐정이었던 주인공 제프(로버트 미첨)의 옆구리에 총을 겨눈다. ‘슈거’에서의 루비도 그렇다면 존 슈거에게 총을 겨눌 것인가.
영화 '과거로부터'의 한 장면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드라마 8부 가운데 이야기를 극적으로 전환시키는 순간은 할아버지 조너던 시걸이 자신이 한 때 끔찍이도 사랑했던 여배우 로레인 애벌리 주연의 클래식 영화 ‘변화의 바람’을 가지고 특별상영을 하는 씬이다. 드라마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극장에 모여 이 영화를 관람한다. 드라마 속에는 흑백영화 ‘변화의 바람’이 35mm필름에다가 2.35 : 1 비율이 스크린으로 영사된다. 모두가 다 가상의 여배우이자, 가상의 영화로서, 드라마 속 영화는 빌리 와일더가 만든 ‘이중배상’을 연상시킨다. 여자가 남편을 죽이기 위해서 한 남자를 사주하고 이용하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 속 영화는 결국 드라마 ‘슈거’의 미스터리를 푸는 클루(clue,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누가 누구를 사주하고 있는가.
영화 '이중배상'의 한 장면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드라마 ‘슈거’는 1940년대 미국 영화의 스피릿(영화 정신)이 빛났던 시대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가득 담아 내 있는 작품이다. 영화광일수록, 씨네필일수록 이 작품에 대한 열광은 가중되고 가중될 것이다. 오프닝 크레딧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과 작품의 분위기를 차용했다. 호퍼의 그림이든 필름 누아르든 기본적으로는 고독과 냉소의 무드를 지니고 있다. 인생은 나아지지 않고 세상은 구원되지 않는다. 반복하거니와 인간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으며 탐정은 의뢰인을 구할 수 없다. 따라서 다른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 8부작 드라마의 진정한 모토이다. 거기에 동의하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순전히 보는 사람들의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애플TV+ '슈거' 공식 예고편]


오동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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