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보헤이둘랑섬의 평온을 담은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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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조원진의 공간의 감각입술에 닿아 커피가 흐르기에 적당한 두께를 가진 잔들은 모두 각자의 목적에 맞는 크기로 만들어졌다. 곱게 바른 유약으로 부드러운 질감이 매력적인 한 잔의 용량은 210mL인데, 카푸치노를 담기에 가장 적절한 크기로 만들어졌다. 약간의 굴곡이 있는 바닥은 스팀 우유가 잘 흘러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며, 천천히 식어가며 달라지는 맛을 즐길 수 있도록 별도의 뚜껑도 갖췄다.에스프레소를 담는 ‘샷 글라스’를 대신하는 또 다른 잔은, 에스프레소 머신의 포터필터 바스켓 사이즈보다 조금 큰 입구를 가지고 있다. 포터필터에서 나온 커피를 흘리지 않고 담을 수 있는 최적의 넓이다. 또 이 잔은 저울과 함께 머신 트레이에 올려도 포터필터에 닿지 않을 적당한 높이를 가지고 있으며, 완성된 에스프레소 샷을 따를 수 있도록 부리도 나와 있다. 누가 봐도 ‘커피를 잘 아는 사람이 만든’ 잔이다.신채용 대표는 이 도기에 ‘사이드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금껏 대부분의 시간을 커피에만 몰두한 인생에서 다른 길도 걸어봐야겠다는 결심이 들어 만든 작품이기 때문이다. 다른 길을 걷겠다는 결심은 커피에 대한 태도에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점심이면 몰려드는 손님들에 정신없이 커피를 내어주는 것이 그의 당연한 일과였는데, 지금은 그보다도 한참이나 느려진 템포로 한 잔의 커피를 내리게 됐기 때문이다.새로운 공간을 꾸리며 선택한 단어 ‘보헤이’는 말레이시아의 보헤이둘랑(Boheydulang)섬에서 따온 말이다. 잔잔한 바람이 평온하게 불어오는 술라웨시해의 맑은 바닷물에 둘러싸인 기분을, 커피 한잔을 마시러 온 사람들이 느꼈으면 하는 마음에 고른 단어다. 그리하여 얕은 언덕을 걸어 올라야 만날 수 있는 신당동의 어느 골목길에, 어르신들이 느긋하게 걸어 다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옛 한복집 자리에 신대표의 또 다른 길 ‘보헤이커피’가 문을 열었다.
신당동 보헤이커피,커피와 도자기의 조화
210mL 카푸치노 잔의 완벽한 비율
에스프레소를 위한 정교한 디자인의 잔
신채용 대표의 새로운 도전, ‘사이드웨이’
건물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낸 철제문을 열고 들어서면 세월을 짐작할 수 있는 테라조 바닥이 눈에 띈다. 내부는 몇 개의 방이 연결되어있는 구조로, 이 방들을 장식한 고매한 패턴의 벽지는 항상 가게를 청결하게 유지하는 주방장이 운영하는 중국집의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방을 한 바퀴 돌아 바가 있는 곳을 향하면 따뜻한 느낌을 주는 바와 원목 테이블이 보인다. 높낮이가 낮은 주택 사이로 비쳐오는 빛은 각도를 달리하며 이곳을 따뜻하게 비춘다. 자리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면 어딘가 모르게 규칙에서 벗어난 듯한 여유로움이 차분한 공기와 함께 공간을 감싸고 있음을 느낀다.주문을 하고 바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커피가 따뜻하게 예열된 잔에 담겨 나온다. 일러주지 않으면 어떤 도예가의 작품 혹은 아주 잘 만든 공산품이라고 생각할법한 잔이다. 이는 신채용 대표가 카페의 정해진 휴일 중 하루를 꾸준히 도예 수업에 몰두한 결과물이기도 하다.신대표는 도기를 굽는 일이 커피와 같다고 말한다. 배토를 고르는 일부터 성형과 정형을 거치는 일, 유약을 바르거나 굽는 일에는 매 순간 신중한 선택 필요로 한다.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되기 위해서는 각 과정에 전문적인 지식을 쌓아야 하지만, 그 지식은 언제나 자연적인 요소들을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 오래 해왔다고 거들먹거리거나 다른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그 거만함이 결과물에 녹아들기도 한다. 그러니 아주 겸손한 태도로, 좋은 재료를 선별하는 취향을 기르고, 기본기에 충실해 그 재료의 특성을 잘 드러내게끔 해야 한다. 보헤이커피에서 마시는 한 잔에는 잔부터 담긴 커피까지 재료에 대한 존중이 느껴진다.이곳에서는 일종의 소스페소 정책도 운영하고 있다. 소스페소(Sospeso)는 ‘미뤄진’, ‘일시 정지된’, ‘미정’이란 뜻을 가진 이탈리아어다. 카페 소스페소는 말 그대로 “주문해 놓고 마시지 않은 커피”를 의미한다.다큐멘터리 <카페 소스페소: 모두를 위한 커피>는 누군가 맡겨둔 커피 한 잔을 두고 자신의 인생을 찾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 중에는 가석방 기간 직업 훈련을 받는 루마니아 청년도 등장한다. 그는 길거리에서 먹고 사는 아이들을 돕는 이탈리아 스쿠치니 협회의 도움으로 피자와 커피에 대한 기술을 배우는데, 협회에서 운영하는 카페는 소스페소 정책을 운영하는 곳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가 끝날 무렵, 잘 적응하는 것 같던 루마니아 청년은 나폴리를 떠나 사라진다. 영상의 마지막에는 “이들이 삶에서 내린 선택은 이들 모두에게 자유를 주었다”는 자막이 나온다. 커피 한 잔을 건네는 ‘카페 소스페소’는 단순히 누군가를 돕는 일과는 다르다. 그저 커피 한 잔이 필요한 어떤 이의 어떤 순간에 소소한 위로를 전할 뿐이다.커피와 도기를 만드는 순간처럼 우리는 모두 인생에서 선택의 기로에 서곤 한다. 각자의 선택이 그들의 인생을 어떤 결론으로 이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선택이 보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응원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정성을 담은 보헤이커피의 ‘한 잔’은 소리 없는 응원과도 같았다.자신의 선택에 따라 인생의 자유를 택한 루마니아 청년처럼, 그 응원은 묵묵하고 또 든든하다. 모처럼 위로를 받았으니 카페의 문을 열고 나설 때 내가 치러야 할 한 잔의 값에 한 잔의 값을 더해 계산을 한다. 누군가 찾을 위로라고 생각하며, 누군가의 응원이 되리라 생각하며.
조원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