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3가역도, 한양도성도… 저마다 그리드가 있구나

[arte] 김현호의 바벨의 도서관

지하철 을지로3가역의 하늘색 그리드

서울 지하철 3호선 역사 근처에 위치한 집에서 할머니가 계신 성내역(현 잠실나루역)까지는 지하철로 40여 분이 걸렸습니다. 어린이였던 저에게 그 시간은 매우 길게 느껴졌습니다. 그나마 유일하게 흥미를 느꼈던 순간은 2호선의 지상 구간을 통과할 때였습니다. 2호선 특유의 초록색 좌석을 거꾸로 돌아앉아 형과 함께 창밖을 구경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원한 풍경만큼이나 생생하게 기억나는 게 있습니다. 바로 3호선과 2호선이 만나는 을지로3가역의 환승 구역입니다. 바닥부터 벽면까지 일관되게 하늘색 타일로 마감해 놓은 이 공간은 격자무늬(그 당시에는 뭐라고 부를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바로 ‘그리드’)로 이뤄진 까닭에 차원 이동을 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습니다. 지금은 바닥을 좀 더 반짝이는 마감재로 교체한 탓에 그때의 무늬는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지만, 수많은 환승 구간 중에서도 을지로3가역은 특별했습니다.

그리드가 만든 도시의 풍경

도시의 풍경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 중에서도 건축물이 차지하는 위상은 남다릅니다. 그래서 날마다 도시를 걷는 우리는 특정 건축물과 직접적인 관계 맺기를 하지 않더라도 자세히 살피며 때로는 마음을 투영하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건축물의 전체적인 모습은 물론이고, 작은 구성단위인 ‘그리드(grid, 격자무늬)’에 대해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환(環) 공포증’을 일으켜 쳐다보기조차 힘들게 느껴지는 건축물부터 마음의 안정을 줄 만큼 ‘딱 적당한 비율을 갖춘’ 것까지 다양하죠.
서울의 건축과 다양한 그리드 / ⓒ김현호
붉은 벽돌을 건축의 단위로 즐겨 활용하는 거장 마리오 보타의 작품부터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시그램타워를 계승하는 것처럼 보이는 커튼월(건축물의 하중을 견딜 필요가 없는 비(非)내력벽을 금속재나 유리로 덮어 마감하는 방식) 건축에 이르기까지 우리 도시에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그리드가 어우러져 있습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지어진 신도시의 집합주택이 특유의 푸근한 외관을 갖게 된 것과는 달리 최근 건축된 주택은 기존과는 확실히 다른 입면과 그리드를 뽐냅니다. 창호 기술의 발달이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폭이 좁은 대신 화려하게 장식됐던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래스가 르코르뷔지에를 중심으로 한 근대 건축 시대에 이르러 가로로 긴 창문으로 변화했듯, 오늘날의 건축 입면은 대개 창호 디자인에 의해 결정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술의 발전이 건축물의 피부를 바꾼 것이죠.
책가도를 닮은 건축과 그리드 / ⓒ김현호
최근에는 마치 책가도(冊架圖)처럼 재미난 입면을 갖춘 건축물도 자주 눈에 띕니다. 단지 창호와 외벽의 색상만으로도 책가도를 바라보는 듯 착시를 만들어내는 건축물을 바라보면 도시에 새로운 리듬감도 생기니 참으로 반가운 일입니다.


한양도성의 단위와 시간

서울이 세계적으로 매력적인 수도의 반열에 오르도록 한 배경에는 높은 수준의 시민의식 외에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지형, 고유의 역사적 맥락 등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수려한 모습으로 쌓아 올린 한양도성의 근사함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대대적으로 복원된 한양도성을 따라 거닐다 보면 축성시기에 따라 모양과 크기가 다른 돌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태조가 성곽을 쌓기 시작했던 시기와 세종, 숙종 때의 돌 모양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그리드를 만들어내는 한양도성 / ⓒ김현호
일종의 실명제이면서 돌의 출처를 기록해 놓은 ‘각자성석(刻字城石, 축성에 참여한 담당자의 이름과 지역 등을 새긴 돌)’으로 유명한 한양도성은 구간마다 조금씩 다른 특징이 오히려 다양한 그리드를 만들어 내며, 오늘의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각자성석에는 축성을 위해 헌신한 당시 민중과 관리들의 이름, 일자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천 년 동안의 이야기마저 머금은 격자라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온기마저 느껴집니다.
덕수궁 돌담길 / ⓒ김현호
한양도성까지 갈 수 없다면, 우리가 좀 더 가까이 둔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어 보기를 권합니다. 돌담이 만들어낸 따뜻한 그리드는 계절과 날씨에 따라 색다른 매력을 줍니다. 생명력이 느껴지는 돌담이라고 해야 할까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오랜 시간이 축적된 그리드는 그 자체로 수려한 작품이 된 듯합니다.


르 코르뷔지에의 모듈러와 인류를 향한 따뜻한 시선

일찍이 근대 건축 거장인 르 코르뷔지에는 인간 신체의 비례를 활용해 건축물의 크기와 가구를 디자인하는 측정 체계 ‘모듈러(Le Modulor)’를 착안해냈습니다. 피보나치수열(첫째 둘째 항이 1, 그 뒤에 이어지는 항은 앞의 두 항을 더한 합으로 1, 1, 2, 3, 5, 8… 인 규칙을 갖는 수열)을 접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르 코르뷔지에가 특정한 수식이나 비례보다 중요하게 여긴 점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른바 ‘휴먼 스케일(Human scale)’이라고 하는 기준을 준수한 건축가로도 유명한데요. 프랑스 마르세이유에 위치한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é d'habitation)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격자를 갖게 된 배경에는 아마도 ‘건축가의 인류를 향한 따뜻한 시선’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프랑스 마르세이유의 유니테 다비타시옹 (Unité d'habitation) / 사진 출처. unsplash
지하철 을지로3가역의 환승구역부터 한양도성의 각자성석, 유니테 다비타시옹에 이르기까지 건축가와 선각자들은 이렇게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켜내야 할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마음과 인류를 향한 친절함뿐이다”

하늘색 타일을 기억하고 가끔이라도 한양도성을 산책하는 까닭도 어쩌면 같은 맥락인가 봅니다. 이번 주말에는 가족들과 추억 속 ‘나만의 그리드’를 찾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벌써부터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김현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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