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과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 깔깔 웃거나, 한없이 심각

[arte] 이재현의 탐나는 책

김사과 소설집 (2024, 창비)
김사과를 꼬박 따라 읽은 지 어느덧 10년이 넘어가지만 나는 김사과를 생각하면 여전히 심각해진다. 간혹 좋은 소설이나 시, 영화를 만나면 난 이 작품의 모든 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 고 곧장 말하게 된다 (물론 진심이지만). 그러나 내게 김사과는 모든 문장을 이해에 앞서 동물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험이다. 어쩌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김사과 소설집 <영이>)에서 내가 처음으로 ‘공포’를 이해했기 때문이 아닐까.

“열심히 살지 않으면 뒤처지고 뒤처지면 끝장”이라는 아버지의 말대로 “엄청난 성취감”을 위해 “인생을 바쳐온” 주인공. 하지만 지금 그에겐 “단지 분노뿐이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의 눈은 그저 ‘공포’에 질려 있을 뿐인데, 똑같은 눈은 거울에서도 발견된다. 왜 모두 공포에 질려 있을까?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 무언가 얻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약속—누구에게서?—은 단지 기만이었다. 지나간 삶, 다가올 삶. 어떤 표정도 없는 시간이라는 존재를 처음으로 실감하기 시작한다. 그 앞에서 오롯이 무력한 스스로가, 주변의 모든 이와 똑 닮은 자신이 분노의 근본 원인이다.정처 없이 거리를 떠돌던 그는 어느 국밥집에 당도한다. 그 국밥집의 주인인 늙은 여자는 그와는 달리 감정을 느끼고, 삶에 기뻐하며, 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준다. 그러나 그는 그 두텁고 다채로운 삶으로의 초대를 거부하고 그 여자를 살해한다. 이를테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노파와 소냐를 동시에 살해했다고 하면 어떨까. 이어 본가로 돌아온 그는 이번에는 카프카 <변신>의 변주인 가족 시퀀스를 연출한다. 악마를 낳았다며 절규하는 아버지와 돼지가 되어가는 누나, 히스테릭과 모성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어머니.

그러니까 21세기의 라스콜리니코프는 최소한의 정신적 체급조차 갖추지 못한 채 한없이 얄팍할 뿐이다. 또는 21세기의 그레고르 잠자가 되어 견뎌내건 그러지 않건 현실과 구분 불가능한 환상 속에서, 그 어디든 지옥이라는 건 분명한 현실 속에서 잠겨갈 뿐……
김사과 소설집 『하이라이프』 (2024, 창비)
“모든 게 망가졌는데 왜 아무것도 무너져내리지 않지?”(<천국에서>)로 대표되는 김사과의 답 없는 질문들. 절박하고 긴급한 것이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외면해야 하는 공포. 내가 서 있는 땅이 과연 안전한지 강박증적으로 묻고 물어야 하는 의심병 환자의 삶이 온전할 리 없다. 땅에 고개를 처박고 주변을 거니는 사람들을 미심쩍게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말을 무한히 반복하는 모습은 코미디다. 하지만 그 모습들이 나의 또 다른 가능세계만 같았다. 그리고 최근 출간된 <하이라이프>를 읽으며, 현실과 꼭 닮은 김사과식 미로가 더 깊은 곳을 탐험해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강렬했던 구렁텅이, '예술가와 그의 보헤미안 친구'로 모두를 초대하고 싶다.
김사과 소설집 『하이라이프』 (2024, 창비) / 이미지 제공. 이재현
서울 소재 중상위권 대학교의 국문학과에 입학한 이수영은 엉뚱하고 비현실적인, 그러니까 남들과는 차별화된 매력을 지닌 동기 한비에게 매료된다. 그런 한비에게 걸맞은 친구가 되기 위해 시를 본격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한 수영은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등단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수영을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의 관심도 없는 것 같기도 한 한비는 영 종잡을 수 없는 존재다. 그렇게 한비를 의식하며, 수영은 “무채색” 샐러리맨의 “멀쩡한 결혼과 제대로 된 직업” 대신 예술가로서 자유롭게—어머니를 속 썩이며—살아간다.

시간이 흘러 한비의 결혼식장에서 수영은 한비의 부모님을 처음 마주한다.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는 한비의 삶의 이면에 경제적 탄탄함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렇게 놀랍지 않다. 그러나 무한히 자애롭고 고상해 보이는 한비의 부모님에게서, 무언가 비틀림을 발견한 수영은 결혼식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와 고래고래 욕을 내뱉으며 엉엉 운다. 그런 수영을 발견한 어머니는 놀라서 그녀를 말린다.

이수영은 거칠게 엄마를 밀어냈다.
“엄마는 몰라! 세상이 얼마나 미쳐 돌아가는지! 엄마는 진짜 몰라! 아빠도 몰라! 아무도 몰라! 모른다고! 아 진짜!”
어머니가 딸을 바라보았다. 딸의 뻘겋게 충혈된 두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수영아……”
“아악 난 어떡하라고!”
“아니 진짜 얘가 왜 이래, 수영아……”
“나는 어떡하냐고! 나는! 나는!”
이수영은 계속해서 악을 썼다. 그녀의 어머니는 처음 마주한 딸의 깊은 절망에 망연자실한 채, 엉거주춤 서 있을 뿐이었다.
'예술가와 그의 보헤미안 친구'에서
수영의 절규를 마주하며, 나도 똑같이 울부짖고만 싶었다……. 무채색의 단조로운 풍경에서 우연히 다른 세계를 엿본 이. 쉽게—정확하게—문학이라고 말해보자. 수영은 한비를 통해 문학에 눈을 떴고, 한비를 문학적인 방식으로 읽어내려 했다. 그러니까 한비는 문학에 대한 하나의 은유. 그런데 그 신비가 밝혀지는 순간은 대상에게 나도 모르게 덧씌웠던 환상이 깨어지는, 기댈 무언가는커녕 혐오하던 무채색 현실의 영위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가혹한 시간이다. 현실이 말 그대로 육박해온다.
돌아보면 김사과는 언제나 그랬다. 무대와 관객석 사이 제4의 벽을 깨뜨리고자 하는 브레히트의 신념을 가장 적실하게 실천하는 소설가가 아니었던가. 탁월한 작가는 불쾌를 무릅쓰지만, 모든 불쾌가 탁월함을 방증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무릅쓰는 불쾌는 자신도 함께 서 있는 땅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문학에 대한 조금의 낭만도 허락하지 않는, 그러한 점에서 지극히 문학적인 소설가. 그래서 나는 김사과의 소설이 무서우면서도 기껍다. 우리가 빚지고 있는 환상을 철저히 깨부숨으로써, 아직 우리에게 남은 지대가 있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 그러니 앞으로도 난 김사과에게 영영 포박되겠구나, 예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재현 문학동네 국내문학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