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의 지하에는 '비누 향기'가 진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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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신미경 개인전전국 곳곳에서 문화를 즐기려는 사람들을 서울 북쪽까지 끌어모으는 곳. 2020년 서울 노원구에 문을 연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이다. 지금 이곳의 문을 열면 기분 좋은 향기로 가득하다. 향을 뿜어내는 주인공은 다름 아닌 ‘비누’다.
'투명하고 향기 나는 천사의 날개 빛깔처럼'
비누로 조각을 하는 작가 신미경이 만들어낸 비누조각의 세계가 가득 펼쳐졌다. 북서울미술관 지하에 자리한 어린이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 ‘투명하고 향기 나는 천사의 날개 빛깔처럼’을 통해서다. 신미경은 이번 전시를 열기 위해 100여 점이 넘는 비누 작품들을 새로 작업했다. 대부분이 올해 첫 선을 보이는 신작이다. 투명한 비누 2t, 불투명한 비누 원료만 1t을 사용했다.신미경은 비누 조각으로 상상의 세계를 펼치는 작가다. 그가 비누를 쓰게 된 계기는 의외로 단순하다. 한국에서 레진을 사용해 조각을 해오던 그는 1998년 학업을 위해 영국으로 넘어가자마자 위기를 맞게 됐다. 당시 다니던 런던 슬레이드 스쿨에서 독성과 독한 냄새 때문에 레진 사용을 금지했던 것이다.그는 그 상황에서 색다른 시도를 문화적인 충돌 속에서 새로운 컨셉트와 재료를 찾아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는 동시에 새로운 환경에서 색다른 시도를 해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리곤 우연히 비누라는 재료와 마주했다. 화장실에서 보게 된 조그마한 핑크색 비누가 대리석처럼 보였던 그는 그 날 비누를 조각해보기로 했다.
그의 비누를 향한 뚝심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지난해 10월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야외 광장에 대형 비누 조각 ‘동양의 신들이 강림하다’를 세우며 세계 미술 애호가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당시 뉴욕타임즈가 신미경의 미술 조각 세계를 비중 있게 보도했을 정도다.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주제는 천사. 천사라는 존재는 인간에게 실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술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 영감을 얻었다. 그는 존재했다 사라지는 천사의 존재가 마치 쓰여 닳아 없어지는 비누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원본이 이미 있는 천사 동상을 비누로 재탄생시키는 작업 방식을 택했다.
지하 1층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관람객들은 붉은 공간에 압도당한다. 세 면의 벽과 바닥, 그리고 작품을 받치는 좌대가 모두 새빨갛게 물들어 있다. 미술관은 관객들로 하여금 비누 작품이 가진 다채로운 색에만 집중하게 만들기 위해 공간을 오히려 강렬한 색으로 통일시키는 역발상을 꾀했다.두 개의 층으로 이뤄진 전시장은 층과 층 사이를 천장으로 막는 대신 계단으로 이어 층고를 높였다. 위쪽 뚫린 공간에는 천사를 모티브로 한 르네상스 작품 두 점을 인쇄해 붙였다. 관람객들은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와야 하는데, 신미경은 “어린이박물관으로 계단을 타고 내려올 아이들의 모습이 천사와 닮았다고 상상했다”고 말했다.이 공간의 중심이 되는 작품은 긴 봉을 들고 있는 천사 조각 시리즈다. 이 작품을 받치고 있는 좌대는 계단처럼 한 단계씩 높아진다. 색색의 비누천사 조각이 붉은 계단을 타고 하늘을 향해 승천하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벽에 걸린 대형 캔버스 작품. 페인팅처럼 보이지만 이 또한 비누 조각이다. 금속 틀에 비누를 물감처럼 부어 순간적으로 굳힌 작품이다. 대형 비누작품의 특성상 가까이 다가가면 향기가 코를 자극한다. 입체감도 느껴진다. 직접 미술관에 오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경험이다.신미경은 “이 비누 페인팅 작업이 가장 고되고 어렵지만 재미있다”고 했다. 여러 색의 비누를 한번에 끓여 동시에 부은 후 한꺼번에 굳혀야 하기 때문에 작업 과정을 통제하기가 어렵다. 그는 “내가 원하는대로 결과물을 만들 수 없다는 불확실성이 비누 페인팅의 즐거움이다”라며 "한 번 나온 작품은 절대 재현할 수 없다는 게 작업을 더욱 특별하게 한다”고 말했다.다음 전시 공간으로 넘어가면 자연광이 관객을 맞이한다. 빛이 들어오는 창가 앞에는 마치 창문처럼 네모난 구멍이 뚫린 구조물을 설치하고 그 사이 투명 비누로 만든 엔젤 조각 시리즈들을 들여놓았다. 밖에서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천사 작품의 투명함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기 위한 구성이다. 마치 성당이나 교회 창문에 쓰이는 스테인드글라스와 같은 느낌을 선사한다.두 번째 전시장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은 어린이 관객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는 점이다. 신미경이 처음으로 시도한 드로잉 작업을 따라해볼 수 있다. 그는 ‘엔젤 향’이라고 불리는 향유 세 가지를 발견하곤 그것을 모두 사들여 종이 위에 뿌렸다. 그리곤 각 향유마다 다르게 번지는 모습을 세 가지 다른 색깔의 색연필로 따라 그렸다. 관람객은 작가가 사용했던 같은 종이, 같은 향유로 엔젤 향 드로잉을 직접 그려볼 수 있다.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전시장 바깥에 있다. 바로 화장실이다. 화장실 세면대 옆에는 신미경의 대형 비누 천사 조각들이 놓였다. 미술관을 찾는 관객들은 손을 씻을 때 신미경의 비누 작품을 문질러 사용한다. 그리고 그 조각이 닳아 없어진 모습을 다시 전시장 안으로 들여놓는다.같은 관객이 두 번 전시장을 찾아오더라도 다른 작품을 만나볼 수 있게 꾸민 작가의 의도다. 이러한 ‘작품 순환 실험’은 신미경의 작가 인생에서도 첫 시도다. 전시는 내년 5월 5일까지 이어진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