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에 찬 사람들이 떠난 자리, 시위장에 쌓인 의자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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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희 작가지난해 어느 여름날 밤, 서울 광화문역 근처를 지나던 김건희 작가(55)는 겹겹이 쌓여 있는 의자 더미를 발견했다. 시위대가 집회를 마친 뒤 정리해둔 수백 개의 의자들이었다. 그 모습에 홀리듯 빠져든 김 작가는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은 뒤 이를 그림으로 그리고, 다시 그 세부 곳곳을 크게 확대해 그리기 시작했다.
이유진갤러리서 개인전
서울 청담동 이유진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김 작가의 개인전은 이런 작업의 결과물 20여점을 내건 전시다. 특별할 것 없는 의자들의 모습에 ‘꽂힌’ 이유에 대해 작가는 “의자들이 세상의 ‘불확실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시위라는 건 자기 신념을 강력하게 표현하면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방법이잖아요. 그런데 살다 보니 세상엔 옳고 그름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일보다 그렇지 않은 미묘한 일들이 훨씬 더 많더군요. 시위가 끝난 뒤 남겨진 의자들의 지저분하면서도 쓸쓸한 모습이, 세상의 ‘진짜 모습’인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전시 제목을 ‘그렇다. 그리고 그렇지 않다’로 정한 것도, 원래 풍경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확대한 이미지들을 여러 장 그린 것도 세상의 이런 불확실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흥미로운 건 작품 대부분이 캔버스가 아니라 갱지에 그린 유화라는 것이다. 작가는 “처음에는 값이 싸서 갱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유화물감과 갱지가 만나 만들어낸 독특한 질감에 푹 빠져 계속 그리게 됐다”고 말했다. 딸을 홀로 키우며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그림을 포기하지 않은 작가의 의지, 구상화가 추상화로 바뀌는 과정을 연작으로 표현한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전시다. 전시는 오는 22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