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기업엔 '기울어진 운동장'인 증선위

금감원이 판·검사 모두 맡고
기업은 변론 기회조차 한정

선한결 증권부 기자
국내 기업들에 금융위원회와 금융위 산하 증권선물위원회, 감리위원회는 사법 재판부와 맞먹는 영향을 미친다. 기업의 각종 회계 처리와 자금 조달 방식 등에 대해 적정성을 심리하고 판단하는 기구라서다. 이들이 주요 사안에 ‘부적절’ 판정을 내리면 기업의 신용도가 크게 흔들린다. 기업 최고경영자(CEO)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 CEO 직무 정지, 향후 업계 취업 제한 등 각종 징계 조치를 적용할 권한도 있어서다.

막대한 영향력에 비해 공정성은 의문이라는 게 기업과 회계업계의 중론이다. 문제 제기부터 심리, 의결까지가 기업엔 사실상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서다.일단 절차와 구성부터가 그렇다. 통상 금융감독원이 기업에 문제를 제기하고, 감리위의 심의를 거쳐 금융위와 증선위가 고의 여부와 사안의 중요성 등을 반영한 조치를 결정하는 구조다. 그런데 감리위 심의 과정엔 금감원 소속인 회계전문 심의위원이 참여한다. 회계 관련 사안이라면 금감원의 회계 부문 국장이 보고한 내용을 금감원의 회계업무 총괄 담당자가 판단한다. 재판으로 치면 금감원이 검사와 판사 양쪽을 모두 맡는 셈이다.

기업과 금감원이 서로 논리 다툼을 하는 과정도 공정하다고 보긴 어렵다. 현행 제도에 따르면 금감원의 ‘혐의’ 의혹을 받는 기업이 감리위와 증선위 출석 전에 반론 내용을 요약해 금감원에 사전 제출해야 한다. 기업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려는 쪽에 기업이 자신들의 반박 주요 근거를 미리 알린다는 얘기다. 이렇다 보니 금감원은 성공적인 논박을 위해선 어느 지점을 피해야 할지 등을 먼저 알고 날카로운 공격을 하기가 더 쉽다. 반면 기업은 예상치 못한 지적에 대해선 즉석에서 소명해야 한다.

변론 기회도 기업에는 한정돼 있다. 기업의 소명이 끝난 뒤 기업 측 관계자들이 퇴장하면 사안을 보고한 금감원 국장 등은 회의석에 계속 자리한다. 기업의 발언 내용에 대해 재반론을 하고, 증선위원 등의 추가 질문엔 금감원의 시각에서 답변도 내놓을 수 있다. 반면 이미 퇴장한 기업 관계자들은 어떤 이야기가 추가로 오갔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다.

이런 ‘깜깜이’ 제도를 개선하지 않으면 주요 논의가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기업과 투자자에겐 불확실성만 커지고 정작 제대로 된 판단이 나오기 힘들다는 얘기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 혐의도 이런 이유로 지난한 과정을 거쳐 지난 2월 무죄 취지의 판결을 받았다. 금감원이 회계처리 기준 위반 의혹을 제기한 지 약 6년 만이다. 전문가들은 금감원과 기업이 평평한 운동장에 서고, 심의기구의 독립성도 더 확보돼야 한다고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