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에서 점 하나를 찍게해줬을 뿐인데 나타난 기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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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임지영의 예썰 재밌고 만만한 예술썰 풀기쭈뼛쭈뼛, 우물쭈물, 흔들리는 동공. 갤러리에 들어온 우리의 모습이다. 예술 앞에서 우린 대체로 자신이 없다. 큰 미술관은 그래도 눈에 안 띄게 다닐 수 있는데 작은 공간일수록 불편하므로 잘 가지 않게 된다. 나 무식한데 말 시키면 어떡해.
"자, 여기요." 오렌지 스티커 하나를 내민다. 그리고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여기서 가장 마음에 드는 한점만 찾아보세요."
처음엔 모두 당황한다. 좋아하는 그림 한 점을 찾으라고? 모두 오렌지 스티커를 들고서 어정쩡한 채 그림을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마음에 드는 한점을 찾는다. 그 한점에 지금 내가 들어있다. 오늘 나의 마음, 지금 나의 상태, 나의 꿈, 나의 바람, 나의 감정, 나의 이야기. 물론 깊이를 말하기엔 아주 짧은 시간이다. 우연히 들어온 작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이고. 그런데 이런 직접적이고 능동적인 예술 향유의 경험은 처음이다.

얼마 전 문래동 골목에 어린이 갤러리 한 점을 열었다. 느닷없는 결정이었지만 오래 기다려온 기회 같기도 했다. 문래 골목에는 주말 나들이 나온 가족들, 젊은이가 많았다. 퍽 많은 사람들이 나의 한점을 찾아 오렌지 스티커를 붙이고 글을 썼다. 당황은 곧 재미가 됐고, 경험은 바로 향유가 됐다.

지금까지 가장 많은 오렌지 스티커가 붙은 그림은 놀랍게도 전시된 작품 중 제일 어두운 그림이다. 김춘재 작가의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 깊은 가을밤 사방이 깜깜한데 한사람이 버스 정류장에 서 있다. 어둠 속에 빛은 더 환하고 강렬하다. 신기하게도 어른부터 어린이까지 이 그림 앞에 서서 응시하는 사람이 많았다. 한 여중생이 이런 글을 남기고 갔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
어두운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버스를 타고 밝은 곳 어디로든 갈 수 있듯이,
내가 지금은 어둡지만 언젠가는 밝게 빛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
언젠가는 나도 밝은 빛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14세 소녀
우리는 예술이든 인생이든 향유를 배운 적이 없다. 먹고 사는 일이 바빠서, 예술은 배운 자들의 사치니까, 시간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등등 못 할 이유는 백 한가지다. 그 모든 이유는 선입견과 편견이 만든 벽이다. 벽을 문으로 만드는 질문, 마음에 드는 그림 한 점을 찾아보세요! 내가 나를 알아가는 시작점이다. 나의 취향의 시작이다.
갤러리의 그림들은 아주 낮게 걸려있다. 더러 그림이 왜 이리 낮게 걸려있냐, 그림을 왜 바닥에 뒀냐, 이건 아니지 않냐 하는데, 어린이를 위한 배려다. 아이들이 그림에 오렌지 스티커를 붙이고, 그 앞에서 글을 쓰기도 한다. 작은 의자에 앉아서 한참 그림과 논다.
임지영 예술 칼럼니스트·(주)즐거운예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