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흡연율 높이는 주범인데…가향담배 규제 손놓은 한국

이슈분석

멘톨·과일·초콜릿 향 등 추가
담배에 대한 호기심 자극
중·고생 흡연 80%가 가향담배
청소년에게 노출된 가향담배 멘톨, 과일 향 등이 첨가된 가향 담배가 청소년 흡연을 부추긴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서울 마포구 한 무인점포 자판기에 가향 전자 담배가 진열돼 있다. 연합뉴스
최근 몇 년 새 가향(加香) 담배와 전자 담배 등 신종 담배 제품이 인기를 끌면서 국가적 금연 운동이 무색하게 담배 소비가 증가세로 반전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중·고교 흡연 학생 열 명 중 여덟 명이 피우는 가향 담배의 폐해가 크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은 “청소년의 흡연 장벽을 낮춘다”며 가향 담배 판매를 금지하는 추세지만 국내에선 관련 규제가 전무하다.

청소년 유혹하는 가향 담배

4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지난해 담배 판매량은 37억4300만 갑으로 전년(37억1400만 갑) 대비 0.8% 늘었다. 2년 연속 증가세다. 특히 가향 담배 판매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2013년 4억2000만 갑이던 가향 담배 판매량(보건복지부 추계)은 2018년 10억 갑을 처음 돌파한 뒤 2022년 16억3000만 갑으로 늘었고 작년에도 더 증가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전체 담배 시장에서 가향 담배 판매 비중은 2013년 9.8%에서 2022년 44%로 네 배 넘게 높아졌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만 13~39세 흡연자 중 77.2%가 가향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향 담배는 멘톨·과일·초콜릿 향 등을 추가한 일반 궐련형 담배와 전자 담배를 뜻한다. 담배 필터에 감미료를 바르거나 필터 안에 향을 내는 캡슐을 넣는 식이다. 대개 담배 이름에 ‘아이스’ ‘쿨’ ‘퍼플’ ‘부스트’ 같은 단어가 붙는다.

담배 가향 성분은 담배에 대한 거부감을 덜고 흡연을 유인하는 효과가 있다. 박하 향을 내는 이소멘톤, 이소푸레골, 멘톨과 코코아 향을 내는 테오브로민 등은 기관지를 확장해 담배 연기를 더 깊게 흡입하는 효과를 내는 것으로 알려졌다.일부 가향 물질은 불에 타는 과정에서 발암물질이 나온다. 설탕 같은 감미료는 연소하면 아세트알데히드가 발생하는데, 이는 숙취를 일으키는 알코올 성분으로 발암물질이다. 바닐라 향을 더하는 바닐린은 식품첨가물로 쓰이는 유해 물질로 연소하지 않아도 몸에 안 좋은데, 연소하면 아세트알데히드까지 발생한다.

질병청 연구 결과 국내에서 팔리는 가향(캡슐형) 담배 29종에서 128종의 유해 성분이 검출됐다. 가향 담배가 기관지 감각을 무디게 해 흡연자가 담배 속 유해 물질을 더 많이 흡수하게 한다는 해외 연구 결과도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가향 담배가 흡연 시작 연령을 낮출 수 있다는 점이다. 다양한 감미료가 담배의 위험성을 가려 청소년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질병청이 2022년 흡연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만 13~18세 흡연자 중 85%가 가향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향 담배가 흡연을 처음 시도하는 데 영향을 줬다’는 응답(67.6%)은 ‘그렇지 않다’(32.4%)보다 두 배 넘게 많았다. 청소년 중 62.7%가 가향 담배로 흡연을 시작했고 이 중 89.6%는 캡슐 담배 감미료가 흡연 시작에 영향을 미쳤다고 응답한 조사 결과(리얼미터)도 있다. 달콤하거나 시원한 맛의 가향 담배가 청소년 흡연을 부추긴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美·EU는 가향 담배 퇴출

세계보건기구(WHO)는 담배 규제 기본 협약 지침을 통해 가향 성분 등 담배 맛을 향상하는 각종 첨가물 사용을 금지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선 가향 담배에 대한 규제가 없다. 담배에 가향 물질을 첨가하면 이를 표시하는 문구나 그림 등을 포장에 넣지 못하게 한 것이 유일한 규제다.

한국과 달리 미국 등 주요 선진국은 가향 담배 판매를 원천적으로 막는 추세다. 미국은 2009년부터 모든 담배에 가향 물질(멘톨 제외)을 넣는 것을 제한하고 있다. 유럽연합(EU)과 캐나다는 각각 2020년, 2017년 멘톨 담배 판매를 금지했다. 뉴욕타임스는 가향 담배를 금지한 캐나다에서 130만여 명이 담배를 끊었다고 보도했다.지난달 14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8회 미국 전자 담배 서밋’에서도 금연, 공중보건 전문가들은 가향 담배 유통을 적극적으로 규제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애비게일 프리드먼 예일대 공중보건대 교수는 “최근 선진국들의 금연 정책 화두는 청소년 보호 차원의 가향 담배 금지와 1회용 액상 담배 퇴출이 핵심”이라고 했다. 브라이언 킹 미국 식품의약국(FDA) 담배제품센터장도 “10년 전 금연 정책 목표가 일반 궐련 담배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청소년의 가향 전자 담배 사용을 막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하헌형 기자 hh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