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 가해자들의 일상으로 홀로코스트를 보고 듣다

[arte] 이동윤의 아트하우스 칼럼

영화 리뷰
홀로코스트가 남긴 유산과 질문들
가해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이 질문에 응답하듯 유대인 학살의 주범이었던 독일군의 시점으로 아우슈비츠를 낯설게 바라본다. 가해자의 입장에 서서 홀로코스트 상황을 경험하는 것은 가급적 회피하고 싶은 일임에 분명하다. 반면 악을 단순한 악으로 규정하고 악에 대한 존재론적 사유를 지극히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 또한 참혹한 비극의 역사를 외면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악의 평범성을 넘어 악의 본질을 해부하는 작품,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펼쳐 놓는 지옥도는 어떤 풍경일지 그 속을 들여다본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공식 포스터 / 사진 제공. CJNEWSROOM

쇼트에 모든 세계를 담아내는 글레이저 감독의 힘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영국의 아슈케나지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슈케나지 유대인은 이디시어를 사용하는 유럽의 유대인들을 일컫는다. 19세기 이후 러시아, 독일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한 홀로코스트의 주된 피해자였으며 양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미국에 정착하여 현재 이스라엘의 시오니즘 사상을 주장하는 주체 세력이기도 하다.

글레이저 감독의 조부모님들 또한 러시아에서 발생한 키시네프 포그롬(Kishinev pogrom) 학살을 피해 영국으로 이주했고 진보적인 유대교 분위기 속에서 가족을 일구었다. 그 덕분에 영화를 좋아하는 아버지 영향으로 글레이저 감독은 다양한 대중문화를 접하며 성장기를 보낼 수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미술학교에 진학하여 무대디자인을 전공하고 영화, 뮤직비디오, TV 광고 업계에 뛰어들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는 회스 가족 / 사진 제공. CJNEWSROOM
그의 재능을 처음으로 인정한 곳은 광고계였다. 기네스, 스텔라 아르투아, 리바이스, 소니 등 다양한 기업과 협업하여 기념비적인 광고를 만들었고 여러 광고계의 상을 수상했다. 뮤직비디오는 매시브 어택의 ‘Karmacoma’를 시작으로 자미로콰이, 라디오헤드, 웅클의 음악에 영상을 입혔는데 이를 통해 감독으로서 그의 역량 또한 재발견된다.이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에 벤 킹슬리를 노미네이트시킨 <섹시 비스트>(2000)를 시작으로 니콜 키드먼이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된 <탄생>(2004)이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며 영화계에서도 연출력을 인정 받는다. 하지만 영화계의 주목과는 달리 세 번째 작품인 <언더 더 스킨>은 9년이 지난 2013년에서야 비로소 발표되었다. 베니스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었을 때 집단적 야유가 쏟아졌을 정도로 관객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작품이었지만 2019년 진행된 2010년대 최고영화 순위에서 12위로 선정될 정도로 논란의 중심에 놓이기도 했다.
루돌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정원에 모여든 독일 장교들 / 사진 제공. CJNEWSROOM
물론 단 세 편의 작품만으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작품 세계를 일별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만큼 세 작품은 스타일도 다르고 주제도 너무 상반된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를 대하는 그의 태도만큼은 일관되어 보이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의 쇼트(Shot·촬영을 통해 만들어지는 하나의 장면. 일반적으로 감독의 “액션”, “컷” 사인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안에서 완성된다.

그에게 하나의 쇼트는 최대한의 의미와 감정, 서사가 집약될 수 있는 거대한 공간이다. 단 몇 초 안에 모든 승부를 봐야 하는 광고의 언어를 습득한 결과다.이전의 세 작품 속에서 엿볼 수 있는 슬로우모션과 빅클로즈업,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와 날것 그대로를 드러내는 하위문화의 활용까지, 그의 작품 세계를 단 몇 가지 말로 쉽게 정의 내릴 수 없지만 적어도 승부처가 하나의 쇼트임을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또한 이러한 감독의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고정된 카메라와 광각렌즈의 활용, 네거티브 이미지와 롱쇼트의 반복을 통해서 구축된 개별 쇼트들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서사체이며 하나의 작은 작품이다. 만약 우리가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이해하려 한다면 이 쇼트들을 전달하려는 의미에 귀 기울여야만 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이미지와 사운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아우슈비츠.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와 아내 헤트비히(산드라 휠러)는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아우슈비츠 사택에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일군다. 그들의 사택은 크게 2층 건물과 마당, 넓은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자의 용도에 따라 분절되어 있는 좁은 복도와 공간들은 모던한 건물 외관과 대조되어 더욱 전통적인 공간처럼 다가온다.

건물 앞의 작은 마당은 손님을 맞이하는 입구이자 가족의 일상이 영위되는 공간인데 마치 미국의 중서부 중산층이 살법한 평화로운 풍경으로 연출된다. 마당으로 연결된 넓은 정원에는 작은 수영장과 정성 들여 일군 화단과 온실이 존재한다. 헤트비히의 정성과 꿈이 담긴 공간이다.
정원의 풀장에서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는 회스 가족과 이웃들 / 사진 제공. CJNEWSROOM
글레이저 감독은 이 공간들을 개별적인 쇼트들의 연결로 구성한다. 하나의 공간에는 단 하나의 카메라만 놓인다. 그리고 고집스럽게 고정된 채, 마치 감시 카메라처럼 공간을 응시한다. 일반적으로 카메라의 움직임과 다양한 편집 방식을 통해 하나의 공간을 입체적으로 구성하는 영화들과 달리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카메라는 오직 하나의 카메라에 담긴 공간의 인상만으로 그 세계를 파악하도록 이끈다. 카메라가 보여주지 않는 영역,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영역은 절대적으로 관객의 상상력에 의지한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도록 만드는 감독의 전략으로 인해 관객은 철저히 가해자의 위치에 고정되어 잔혹한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헤트비히가 모피코트를 입고 거울 앞에서 뽐낼 때, 우린 모두 그 옷이 유대인들에게서 빼앗은 옷임을 충분히 인식하지만, 이 모습을 담아내는 쇼트는 지극히 일상의 한순간처럼 잠잠히 그녀를 응시한다. 마찬가지로 바로 직전, 헤트비히가 마치 자선하듯 뿌린 옷더미 속에서 자신에게 맞는 옷을 고르는 하녀들의 무표정한 시선을 카메라는 특별한 감정을 담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바라본다. 지독하게 감정을 배제한 카메라의 시선은 학살이 자행되는 같은 공간 안에서 일상을 향유하는 회스 가족의 이면을 까발린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악의 평범성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대면시킨다.
유대인에게서 빼앗은 모피코트를 입어보는 헤트비히 / 사진 제공. CJNEWSROOM
분절된 공간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은 담장 밖에서 들려오는 엠비언스 사운드다. 마치 공장 소음처럼 들리기도 하는 사운드 사이사이에 간헐적으로 비명과 총성이 뒤섞여 이곳이 어디인지 끊임없이 되새기게 만든다. 카메라가 집요할 정도로 비극의 현장으로부터 거리 두고 외면한다면 사운드는 집요하게 모든 관심과 초점을 담장 밖 학살에 맞춘다. 하지만 사운드의 의지와 반대로 때때로 아우슈비츠의 백색 소음은 일상의 이미지에 뒤섞여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관객의 체험은 담장 밖 사건들을 대하는 회스 가족의 감각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향한 폭력의 현장을 외면하거나 모른 척 치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발생하고 있음을 정확히 인식하며 이를 당연시 여긴다. 악의 평범성은 바로 여기서 꽃 피운다. 비극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비극이 비극이 아니라고 이해하는 뻔뻔함. 유대인들이 학살당하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 그 학살을 응시면서도 어떤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 속에서 악의 평범성은 꽃 피운다.

글레이저 감독이 남긴 질문들

글레이저 감독에게 홀로코스트는 종결된 역사가 아닌 현재 진행 중인 비극인 셈이다. 유대인인 그가 가해자의 위치에 서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현재도 벌어지고 있는 전 지구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피해자인 그가 어쩌면 우리 모두 현 사태의 가해자는 아닐지 한 번쯤 되돌아봐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을 우리는 절대 외면할 수 없다.<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그 질문에 대한 감독만의 답변이라면 이젠 관객인 우리가 답해야 할 차례다. 나는 과연 지금도 학살이 자행되는 현실에 맞서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폭력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져 가는 한국 사회에 사는 우리 또한 절대 회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한가로운 오후의 피크닉을 즐기는 회스 가족 / 사진 제공. CJNEWSROOM
이동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