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500년 담은 유물, 경복궁 옛 지하 벙커가 품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지하 수장고 첫 언론 공개
5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수장고가 언론 최초로 공개되고 있다. /이솔 기자
경복궁 동편 건춘문 인근 주차장 지하에는 오래된 벙커가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건물이었다가 광복 후 정부청사로 쓰였던 중앙청의 안보회의장소를 위한 벙커로 1962년 건립된 지하 시설이다. 1983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로 개조된 이후 2005년부터 광복 60주년을 맞아 개관한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로 쓰이고 있다.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 왕실·대한제국 황실 유물 8만8530점이 경복궁 지하에 잠들어 있는 셈이다.

5일 오후 이 수장고가 언론에 처음 공개됐다. 2016년 일반인 40명을 대상으로 한 차례 제한적으로 공개한 이후 엄격히 통제돼 왔던 벙커의 문이 열린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이날 출입 기자를 대상으로 제 5, 10, 11 수장고에서 관리 중인 노부류(왕실 행사 깃발), 어보류, 궁중 현판을 공개했다. 박물관 관계자는 “국민들이 자주 찾는 경복궁 지하에 조선왕실 유물들이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5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언론공개회에서 박물관 관계자가 수장고에 보관된 어보를 들어 보이고 있다. 뉴스1
이날 찾은 수장고는 유물들을 종이·목제·도자·금속 등 재질과 용도에 따라 분류해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지상의 더운 날씨와 달리 시원하고 쾌적한 온·습도가 유지되고 있었다. 지하에 건립된 벙커 특성이 작용한 영향이다. 10수장고의 경우 조선왕실의 어보와 어책, 국왕이 왕비나 왕세자 등을 책봉할 때 내리는 문서인 교명 등 628점이 보관 중이었는데, 1759년 영조가 정조를 왕세손에 책봉할 때 내린 어보 일괄 유물은 200년이 넘는 세월의 흔적이 보이지 않을 만큼 완벽한 상태를 보였다.

다만 수장고마다 유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비좁은 모습이 역력했다. 박물관 수장고 포화율이 이미 160%로 한계치를 넘은 탓이다. 처음부터 수장고로 설계되지 않은 터라 층고가 낮아 규모가 큰 왕실 유물을 보관하기 어려운 점도 눈에 띄었다. 박물관 관계자는 “가마나 마차, 현판 등 사이즈가 큰 왕실유물은 간신히 보관하고 있는 상태”라며 “유물들은 매번 보존관리나 연구가 필요한데 이동도 여의치 않다”고 말했다. 이어 “경기 여주에 임시 수장고가 있지만 유물 관리 측면에서 위급상활 대처나 안정적인 관리를 위해 공간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직원이 수장고에 보관된 어보, 어책, 교명을 공개하고 있다. /뉴스1

이에 국가유산청과 박물관은 왕실 유산 특성에 최적화한 수장·보존처리 공간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대국민 서비스 기능을 강화한 전시형 수장고 형식의 분관 건립을 추진하는 것이다. 정용재 박물관장은 “왕궁, 왕릉과의 유기적인 연계를 위해 서울·경기권에 새로운 수장 공간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