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금융의 기본으로 돌아갈 때

1990년대 이후 국내 금융시장은
장·단기 시장으로 구분돼 관리

어음과 채권 경계 모호해지고
'장기 CP' 판매 늘면서 위험 커져

CP 본질은 단기자금 조달
변칙 막으려면 영역 분명히 해야

강태수 KAIST 금융전문대학원 초빙교수·前 한국은행 부총재보
토르데시야스 조약. 1494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신대륙 발견 이후 새 영토 분계선에 합의했다. 대서양과 태평양 사이 서경 46도 지점에서 남북으로 일직선을 그었다. 일직선의 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스페인 관할이다. 조약 체결에 실패했다면 전쟁을 치렀을 것이다. 경계선이 평화를 담보했다.

금융의 세계에도 서경 46도에 해당하는 ‘선 긋기’가 있다. 금융시장은 만기 1년을 기준으로 단기금융시장(money market)과 장기자본시장(capital market)으로 나뉜다. 예컨대 어음의 주소지는 단기금융시장이다. 주식과 채권은 장기자본시장이 주소지다.우리나라에서 장·단기 금융시장 ‘선 긋기’가 확립된 시기는 1990년대다. 그전에는 대기업이 중소 납품업체에 1년 이상 장기어음을 끊어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시중금리가 연 10%를 훨씬 웃돌던 시절이다. 중소기업은 장기어음을 헐값에 팔아 현금을 마련하며 피눈물을 흘렸다.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가 문제 해결에 나섰다. ‘어음 만기는 1년 이하여야 한다’는 공정거래 관행을 정착시켰다. 그러면서 상법(제469조)에서 말하는 ‘사채(社債)’란 만기 1년 이상이라는 개념이 상식으로 굳어졌다. 그런데 2009년 ‘종합금융회사에 관한 법률’이 자본시장법에 흡수되면서 상식에 금이 갔다. 장기상품을 규율하던 자본시장법이 단기 금융시장으로까지 관장 범위를 넓혔다. 어음과 채권의 경계가 도로 흐려졌다.

급기야 2021년 2월 단기시장 울타리 안에 있어야 할 기업어음(CP)이 ‘장기 CP’라는 이름으로 자본시장에 출현했다. 금융당국이 카드사 등 수신 기능이 없는 여신전문금융회사에 만기 1~10년 장기 CP 발행을 허용한 것이다. 장기 CP는 ‘단거리 마라토너’처럼 어색한 작명이다.장기 CP 주 수요처는 증권사다. 증권사는 채권형 랩어카운트(이하 랩)와 특정금전신탁(이하 신탁) 상품을 판 돈으로 장기 CP를 샀다. 채권형 랩·신탁은 증권사가 고객과 1 대 1 계약을 맺고 자산을 운용해 주는 3~6개월 단기상품이다. 주 고객은 대기업과 연기금·공제회다.

증권사는 장기 CP를 왜 샀을까. 높은 수익률은 법인자금 유치에 필수조건이다. 비결은 장기 CP를 자산에 편입하는 거다. 거래량이 적어 금리가 높다. 30년 전 중소기업을 울리던 장기어음이 고수익 보장, 매력적인 확정금리 상품으로 둔갑했다.

계약 만기 시 돌려줄 자금은 CP를 시가(市價)에 팔아 마련함이 정상이다. 하지만 일부 증권사는 A고객 계좌에 편입된 CP를 다른 증권사에 장부가(帳簿價)로 매도했다. 해당 CP의 시가(時價)가 폭락해도 A고객은 약속했던 수익을 확보했다. 그 대신 상대방 증권사에서 만기가 비슷한 CP를 B고객 계좌로 장부가에 매수했다. B고객 계좌 만기 도래 시에도 같은 방식으로 대응했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채권 돌려막기 꼼수다. 언젠간 파탄 나게 마련이다.2022년 9월 결국 일이 터졌다. 레고랜드 사태다. 자금시장이 경색되자 채권형 랩·신탁 고객들이 환매를 요구했다. 자금난에 허덕이던 증권사는 이자를 지급하지 못하겠다며 버텼다. 랩·신탁 상품 판매로 거액의 성과급을 받은 직원은 상당수 퇴직했다. 고객 반발도 심했다. 감독당국도 난감하다. 징계 범위와 수위를 두고 골머리를 앓고 있다.

장기 CP는 발행 절차와 신용등급 평가가 느슨하다. 장부가로 거래돼 시장가치도 알 길이 없다. 이런 CP가 회사채와 자본시장에서 경합 중이다. 장기 금융시장을 교란하고 있는 거다. 특히 장부가로 사고파는 행위는 2000년 7월 도입한 ‘채권시가평가제도’를 무력화하는 일이다.

CP의 본질은 단기자금 조달이다. 미국은 CP 만기를 270일 이내로 제한한다. 유럽은 1년 미만이다. 장기 CP 발행을 막는 결단이 필요하다. 장·단기 금융시장 구분 철폐가 금융 선진화라는 주장이 그럴듯해 보인다. 그런데 테두리가 분명치 않을 때 규제 차익을 노린 변칙과 편법이 등장한다. 장기 CP가 눈앞의 사례다. 영국과 네덜란드까지 대항해 시대에 뛰어들면서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무력화됐다. 국경 다툼이 격화됐다. 금융영역 간 선 긋기. 530년 전 토르데시야스 조약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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