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과 대화를 나눴던 20세기 건축 거장의 삶 [서평]

루이스 칸: 벽돌에 말을 걸다

웬디 레서 지음
김마림 옮김/사람의집
656쪽|3만원
킴벨미술관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는 인구 10만의 작은 도시다. 인근의 대도시 댈러스를 놔두고 꼭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부분은 킴벨 미술관 때문이다. 언뜻 보면 특별한 것 없는 건물이다. 롤케이크처럼 아치형 지붕을 가진 긴 단층 건물이 나란히 붙어있을 뿐이다. 콘크리트가 그대로 보이고 투박하고 단조롭다. 그런데도 고대 로마 건축물처럼 웅장함이 느껴진다. 지붕 사이로는 빛이 들어와 실내를 은은하게 밝힌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유현준 건축가는 자신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서 이 미술관을 찾아 “건축물이 빛을 어떻게 더 돋보이게 만드냐를 잘 보여주는 건물”이라고 했다.

이 미술관을 설계한 사람은 루이스 칸. 미국 유명 건축가다.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으로 꼽힌다. 안도 다다오에 앞서 노출 콘크리트와 건물 내로 스며드는 빛을 적극 활용했다. 소크 생물학 연구소, 필립스 액스터 도서관,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 등이 대표 작품이다. 그는 73세였던 1974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기차역 화장실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타계 50주기를 맞아 평전인 <루이스 칸: 벽돌에 말을 걸다>가 국내 출간됐다. 2017년 미국에서 나왔을 때 여러 매체에서 호평받은 책이다. 논픽션 작가인 웬디 레서는 방대한 양의 인터뷰, 서간, 일기, 메모, 강연, 연구 문헌 등을 통해 칸의 생애와 작품을 입체적으로 복원했다. 1974년 그의 죽음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1901년 그의 출생과 그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안겼던 사건을 책 마지막에 배치하는 독특한 구성을 취했다.

칸은 훌륭한 건축가지만 복잡한 사생활이 논란이 됐다. 그는 공식적으로 아내 에스더와 딸 수 앤을 두었지만 세 명의 여성과 혼외 관계를 가졌다. 바람만 피운 것이 아니라 혼외 자녀를 낳았고,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서 세 가족을 따로 부양했다. 칸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 인식은 2003년 그의 아들인 너새니얼 칸이 아버지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나의 건축가’를 공개하면서 나아졌다. 칸은 세 가족 사이를 오가며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으로 그려진다.

물론 칸과 가정을 꾸린 여성들과 아이들이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산 것은 아니었다. 책은 ‘정부’라든가 ‘혼외자’라는 말을 들으며 이들이 겪은 아픔과 고통, 아버지 칸에 대한 그리움 등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킴벨미술관 내부
칸을 흥미로운 인물로 만드는 또 다른 요소는 그가 늦게 꽃을 피운 건축가라는 점이다. 그는 50세가 될 때까지 무명에 가까웠다. 1901년 러시아 제국 일부였던 에스토니아에서 태어난 칸은 미국 필라델피아로 이주해 가난 속에 자랐다. 어릴 적 얼굴에 화상을 입었고, 이는 그가 자의식 강한 사람이 되도록 했다. 펜실베이니아대 건축학과를 졸업했을 때가 대공황기였다. 일거리를 찾기 힘들었다. 멋진 건물 대신 실업자를 위한 대규모 사회 주택이 요구되던 때였다. 그의 경력도 천천히 쌓일 수밖에 없었다.

늦게 꽃을 피운 그의 생애 마지막 20년은 화려했다. 대표작들은 60대와 70대 초반에 지어졌다. 로마에 머물며 고대 건축물에 눈을 뜬 것이 큰 영향을 줬다. 책은 “이 기간 질량과 무게가 그에게 특히 중요해졌다”며 “칸은 옛것에 대한 깊은 애정과 새것에 대한 존경이 하나로 모일 수 있는 방법을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책 제목은 선문답 같은 그의 유명한 일화에서 따왔다. 그는 벽돌에 말을 걸곤 했다. “벽돌아, 네가 원하는 게 뭐지? 그럼 벽돌이 대답합니다. 난 아치가 좋아. 그래서 벽돌에 이렇게 말하죠. 아치를 만들려면 돈이 많이 들어. 대신 개구부 위에 콘크리트 상인방을 사용할까 해. 그건 어떻게 생각해? 그럼 벽돌이 또 말하죠. 난 아치가 좋아.”칸의 삶을 잘 정리한 책이지만 건축학적 접근이 약한 것은 책의 약점이다. 저자가 건축을 공부한 적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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