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는 끝나지 않았다"…미디어아트로 부활한 20세기 아시아 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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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격동 아트선재센터, '호추니엔: 시간과 클라우드'
아시아 근현대사를 미디어아트로 재조명
과거와 미래를 잇는 빅데이터와 예술의 융합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지식의 보고(寶庫)인 백과사전이 그랬다. 현대 백과사전의 시초격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도 19세기 제국주의의 팽창과 맞물려 발전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자신감이 반영된 것일까. 서구는 만물의 정보에 알파벳 순서로 이름표를 붙이며 '지식 패권'마저 거머쥐었다.싱가포르 시각예술가 호추니엔이 창조한 백과사전은 두 가지 면에서 독특하다. 먼저 기록의 주체가 다른데, 지금까지 서구에 밀려 외면됐던 아시아의 근현대사가 주인공이다. 다른 한 가지는 고리타분한 '종이책'이 아니라는 점. 영상과 사운드, 설치 작품을 망라한 아시아의 장엄한 대서사시 '호추니엔: 시간과 클라우드' 전시가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 펼쳐졌다.
호추니엔, 그는 누구인가
호추니엔은 지난 20여년간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에 앞장서 왔다. 1976년 싱가포르에서 태어났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받았지만, 유독 과거사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적은 모국(母國)의 행태에 의문을 품었다고. 그때부터 미디어아트 작가와 영화감독을 오가며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철학을 탐구하기 시작했다.전쟁과 살인, 선전·선동과 독재. 어둡고 무거운 테마를 다루는 그에겐 '정치적'이란 수식어가 빠지지 않는다. 그의 작품이 미술품의 값을 따지는 아트페어보다 사회적인 메시지에 주목하는 비엔날레에서 돋보이는 이유다. 2011년 베네치아비엔날레, 2018년 광주비엔날레에서 호추니엔을 지나치듯 만나본 관객이라면, 국내 첫 개인전인 이번 전시에서 그의 작품을 밀도 높게 감상할 수 있다.대표작은 2012~2017년 작업한 '동남아시아 비평 사전' 시리즈다. 서구의 시각에서 획일적으로 다뤄온 아시아 역사의 다채로운 면면을 조명한 미디어 백과사전이다. 동남아 지역사를 대표하는 키워드를 선정하고, 이와 관련해 수집한 사진과 영상자료를 재편집했다. '에이전트(Agent)의 A', '스파이(Spy)의 S', 싱가푸라 왕국을 세운 '우타마(Utama) 왕의 U' 등을 다뤘다.이번 전시 주제를 사전식으로 요약하면 '시간(Time)의 T'다. 전시장 3개 층에 걸쳐 아시아의 시간을 다룬다. 빅데이터, 클라우드 등 미래지향적 기술을 접목한 3층을 시작으로 과거를 탐구한 2층, 마지막으로 현재를 돌아본 지하 1층 순서로 감상하면 전시를 한층 풍부하게 음미할 수 있다.
아시아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3층에는 영상 설치 신작인 '시간의 T'와 '타임피스'(2023~2024)가 걸렸다. '시간의 T'는 시간과 관련된 42개 챕터의 이야기로 구성됐다. 3·1운동 때 거리를 행진한 한국인, 일본 도요타 공장의 조립라인, 동남아 전통 악기를 촬영한 영상 자료 등이 알고리즘에 의해 변칙적으로 상영된다. 각 영상의 주요 장면을 캡처해 43개 화면에 따로 전시한 작품이 '타임피스'다.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의 교집합은 '시간을 둘러싼 권력'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일본 제국주의를 연구하며 시간에 관심을 가졌다"며 "일본이 동남아 시간대를 도쿄 표준시간에 맞추려고 시도한 것이 하나의 사례"라고 했다. '제국주의의 도구'로 전락한 시간이 아닌, 침략당한 이들이 실제 살아간 시간을 살펴보겠다는 취지다.한국 관람객이라면 태평양전쟁 시기를 다룬 2층의 '호텔 아포리아'(2019)에 눈길이 갈 수 있겠다. 지난 2019년 일본 최대의 국제예술제인 아이치트리엔날레에 선보이기 위해 제작된 설치작업이다. 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평화의 소녀상' 전시가 중도 중지되며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행사다. 작품 제목의 '아포리아'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의미한다.당시 일본 큐레이터는 호추니엔한테 아이치현 도요타시에 있는 일본 전통 료칸인 기라쿠테이에서 전시할 것을 제안했다. 그런데 기라쿠테이는 단순한 여관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가미카제 부대가 출발하기 전 마지막 연회를 했던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작가는 이곳에 일본 제국주의의 비극을 보여주는 작품을 설치하기로 결심했다.호텔 아포리아는 '파도' '바람' '보이드' '어린이'란 소제목으로 구성된 6채널 영상작업과 거대한 팬으로 구성됐다. 일본 전통 다다미방처럼 꾸며진 곳에 류이치 요코야마의 선전 만화영화 '잠수함의 후쿠짱'(1944)과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만춘'(1949)이 상영된다. 제국주의 세력에 봉사한 요코야마와 그러지 않았던 야스지로를 나란히 세우며 과거를 돌아보게끔 연출한 구성이다.영상 속 인물들은 얼굴이 지워진 채 등장한다. 연회를 즐기는 일본군 장교, 세뇌 교육을 받는 어린이가 마치 달걀귀신처럼 기괴한 형상으로 그려진다. "누구나 저 얼굴의 주인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제국주의는 과거에 그친 문제가 아닌, 현재에도 유효한 사안이니까요."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엔 황량한 들판이 남았다. 전시장 한편에 바람을 일으키는 거대한 팬이 배치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전쟁과 군국주의의 허무함을 상징하는 장치의 이름은 '보이드(Void·공허)'. 전시장에 울려 퍼지는 윙윙거리는 소리는 전투기 프로펠러가 언제든 재가동할 수 있다는 섬뜩한 경고음으로도 들린다.격랑의 20세기를 보낸 아시아 민초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지하 1층 아트홀에서 상영되는 네 편의 영상 구작은 아시아의 현재를 다룬다. '미지의 구름'(2011)은 싱가포르 임대주택에서 살아가는 저소득층 8명의 이야기. 28분의 상영시간에 걸쳐 무기력해 보이는 삶과 실낱같은 희망을 비춘다.
'굴드'(2009~2013)와 '뉴턴'(2009)에는 공통으로 백색증(白色症)을 앓는 아시아인이 등장한다. 백색증은 피부와 머리카락에서 멜라닌 색소가 합성되지 않아 하얗게 발현하는 증상이다. '굴드'의 피아니스트, '뉴턴'의 만유인력은 각각 서구의 예술과 과학의 결정체로, 작가는 이를 통해 백색주의에 물든 아시아의 현실을 풍자했다.전시는 세기말적 풍경을 묘사한 '지구'(2009~2011)로 마무리된다. 정지된 듯한 화면에 50명의 인간이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것 같은 모습으로 있다. 재난이 닥친 현장, 시체 무더기 속에 갓난아이를 안고 무기력하게 앉아있는 어머니의 도상이다. 침몰하는 배를 그린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1819)이 겹쳐 보인다.아시아를 단순히 역사의 피해자로만 묘사한 전시는 아니다. 전시 제목의 '클라우드(Cloud·구름)'가 힌트다. 클라우드는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는 장막이자 구름에서 비치는 한 줄기 빛, 그리고 호추니엔이 구축한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두루 상징하는 단어다. 전시는 8월 4일까지.
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