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까지 흠뻑 젖은 임윤찬…'대체 불가' 연주로 모든 걸 쏟아냈다

임윤찬 피아노 리사이틀
7일 서울 롯데콘서트홀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 등 연주
무게감 있는 타건으로 역동감 살려
남들과 다른 해석으로 효과 극대화

반주 역할의 왼손 선율에도 돌연 강세
예상치 못한 순간 청각적 쾌감 불러내

2000여명 청중, 뜨거운 환호 기립박수 보내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 글렌 굴드…. 국적도, 나이도, 연주 스타일도 전부 다른 불세출의 천재 피아니스트들이지만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첫 소절만 듣고도 바로 누구의 연주인지 알아챌 수 있는 ‘독보적인 음악 세계’, 같은 곡을 가지고도 수만 가지 경우의 소리를 만들어내는 ‘새로움을 향한 겁 없는 질주’가 이들에겐 있었다. 피아노를 잘 치는 연주자는 많아도, 대체 불가의 피아니스트는 드문 오늘날 피아니스트 임윤찬(20)이 세계의 주목을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음악은 보통의 피아니스트들이 보여주는 연주와 확연히 다르다. 통상적인 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관점에서 작품을 해석하고, 과감하지만 설득력 있는 연주로 단숨에 청중을 장악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지난 7일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임윤찬의 피아노 리사이틀은 그가 ‘이전에 없던 피아니스트’란 걸 다시금 확인시켜준 자리였다.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러시아 작곡가 무소륵스키가 일찍 세상을 떠난 화가 친구 하르트만의 유작 열 점에서 영감을 받아 쓴 작품인 ‘전람회의 그림’이었다. 임윤찬이 ‘전람회의 그림’을 무대에서 연주하는 건 처음이었는데, 피아니스트 호로비츠가 편곡한 버전으로 선보인 그의 음악은 원곡과 편곡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새로운’ 무소륵스키의 형상이었다. 임윤찬은 시작부터 건반을 누르는 깊이와 무게, 페달 움직임, 피아노의 배음과 잔향의 효과를 아주 세밀하게 조율하면서 4개의 프롬나드(promenade·산책), 11개 곡의 성격을 각각 선명하게 들려줬다.
1곡 ‘난쟁이’에선 건반을 아주 강하게 내려치는 도입부와 날카로운 리듬 처리, 긴 숨을 통한 단절 효과 등으로 거칠면서도 야생적인 그만의 소리를 들려줬다. 2곡 ‘고성(옛 성)’에선 반주 역할에 그치는 왼손의 단조 선율에 돌연 거대한 파동을 만들어내면서 원시적인 이미지를 극대화했다. 이따금 호로비츠의 편곡을 따르지 않고, 원곡대로 연주한 4곡 ‘비들로(소달구지)’에선 음 하나하나에 엄청난 무게를 가하는 타건으로 역동감을 불러내면서, 소 무리의 움직임이 보이는 듯한 시각적 효과를 일으켰다.

5곡 ‘껍질을 덜 벗은 햇병아리들의 발레’에선 보통 밝고 활달한 병아리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에 집중하는데, 임윤찬은 한 방향으로 중심이 쏟아지는 듯한 리듬 표현, 조금은 투박하게 느껴질 정도의 사나운 터치로 아직 성숙하지 않은 병아리들의 불안정한 움직임을 생생하게 표현해냈다. 7곡 ‘리모주의 시장’에서부턴 음량, 화성, 선율 표현뿐 아니라 속도 자체에도 큰 변화를 주면서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의 긴장감을 선사했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주로 혼잡한 시장통을 실감 나게 묘사한 그는 다음 곡 ‘카타콤(로마 공동묘지)’으로 넘어가자, 가슴을 파고드는 듯한 어두운 음색과 전체를 관통하는 깊은 호흡으로 각 화음을 아주 길게 끌면서 암흑의 세계를 끌어왔다.10곡 ‘바바야가(마귀할멈)’에서부턴 극적인 표현력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임윤찬은 마치 건반 위로 엄청난 무게의 쇠공을 떨어뜨리고 있단 착각을 일으킬 정도의 열정적인 타건, 안정적이기보단 위험을 무릅쓴 격정적인 악상 표현, 구조를 세밀하게 드러내기보단 작품 자체의 광포한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한 빠른 템포의 기교 처리로 그전에 없던 극한의 힘을 보여줬다. 마지막 곡은 ‘키이우의 대문’. 보통의 피아니스트라면 신성한 찬가를 읊는 것처럼 찬란한 화성과 맑은 울림에 집중하겠지만, 임윤찬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상의 웅장함을 펼쳐내면서 청중을 압도했다. 몸이 뒤로 젖혀질 정도로 강하게 발을 구르면서 발생해내는 광활한 울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걸 쏟아부으면서 배어 나오는 거친 숨소리, 응축된 음악적 표현을 증폭시키면서 만들어내는 폭발적인 에너지는 한동안 숨을 쉬이 내쉴 수 없을 정도의 충격적인 경험을 선사했다.
1부에서 연주된 멘델스존의 ‘무언가’(작품번호 19-1, 85-4), 차이콥스키의 ‘사계’를 포함하면 총 100분간(인터미션 제외)의 공연. 얼굴과 머리카락이 땀으로 범벅이 된 그가 비로소 건반에서 손을 떼자, 2000여명의 청중은 귀가 터질 듯한 환호성과 기립 박수로 뜨겁게 호응했다. 여덟 번의 커튼콜, 두 번의 앙코르를 지낸 뒤에도 사람들은 좀처럼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그럴 만한 연주였다.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에 자신을 내던짐으로써 연주자의 한계(限界)를 뛰어넘는 피아니스트.’ 이보다 더 정확히 그를 표현할 문구가 있을까.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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