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주인공 꿈꾸는 언더스터디 '더 발레리나'

제14회 대한민국 발레축제 초청작
유니버설발레단 창단 40주년 기념 공연
준비된 언더스터디(주역의 대역)였던 강수진(현 국립발레단장 겸 예술감독)은 현역 시절, 슈트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6번의 캐스팅 변경 끝에 주역이 돼 커리어에 꽃을 피웠다. 같은 발레단 한국인 후배 강효정도 12번째 언더스터디였으나 줄리엣으로 변신해 공연 직후 수석무용수로 승급했다. 국립발레단서 군무를 추던 이영철(현 국립발레단 발레마스터)은 주연의 부재에 갑작스레 투입됐지만 큰 성공을 거두며 대체 불가 발레리노가 됐고, 헝가리 국립발레단에서 활약한 이유림(현재 유니버설발레단원)도 누군가의 부상으로 기회를 잡아 성장할 수 있었다.

유니버설발레단의 40주년 기념작이자 14회 대한민국 발레축제 초청작인 '더 발레리나'는 무용수들의 무대 뒤 분투를 솔직하게 그려냈다. 그러면서도 준비된 자가 기회를 잡는다는 언더스터디의 서사를 풀어내 감동을 선사했다.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지난 1일 선보인 공연에서다. 무대가 아닌 연습실과 대기실에서 벌어지는 1부 스토리는 단순하지만, 압도적 안무로 그 틈을 메운다. 2부는 이들이 본 공연을 이어가는 '이야기 속 이야기'로 속도감 있게 펼쳐진다. 연습실과 무대 뒷편, 공연장까지 한편의 브이로그를 보는듯한 독특한 연출로 발레에 대한 대중의 심리적 장벽을 낮춘 게 특징이다.
사진. ⓒUniversal Ballet, Photo by Kyoungjin Kim
'더 발레리나'는 2022년 하남 등 5개 도시에서 초연됐다. 서울에서는 올해 대한민국 발레축제를 통해 첫 선을 보였다. 공연 시작 시간 10분 전, 무용수들이 하나둘씩 토슈즈를 들고 무대에 올랐다. 이들은 술렁이는 관객을 의식하지 않은 채 평소처럼 몸을 풀었다. 이윽고 마이크를 착용한 '발레마스터'역의 무용수가 등장해 무용수들을 지도하는데, 연습을 마치 실제 공연처럼 선보이는 무용수들의 모습에 관객들은 점차 빠져들게 된다. 이 연습 장면은 공연 전날의 마지막 리허설 상황. 갑자기 주역 발레리나가 발목 부상을 입어 발레단은 위기에 처한다.
사진. ⓒUniversal Ballet, Photo by Kyoungjin Kim
이 때 거위의 꿈을 품은 신예 발레리나가 용기를 낸다. 부상 당한 여주인공을 대신해 이어진 완벽한 2인무에 발레마스터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언젠가 주역으로 서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반복했을 그녀가 새로운 주인공이 되자, 무용수들과 관객은 하나가 돼 박수를 보냈다. 2부에서는 무용수들의 공연 당일을 표현했다.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에 안무한 '파가니니 랩소디', 미국 작곡가 맥도웰의 음악을 활용한 '맥도웰 피아노 협주곡 파드되(2인무)' 그리고 올해 1월 '코리안 이모션 정(情)'을 통해 선보이기도 한 창착발레 '미리내길'과 '비연' 등 4편의 소품이 무대에 올랐다.
미리내길 /사진. ⓒUniversal Ballet, Photo by Kyoungjin Kim
4편 가운데 가장 큰 박수를 받은 건 단연 '미리내길'이었다. 지난해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 강미선에게 무용계 최고 영예인 '브누아 라 당스' 수상을 안겨준 그 작품이기도 하다.

1부에서 주역을 거머 쥔 발레리나는 미리내길에서 파트너와 함께 공기 속을 헤집듯 가벼운 스텝으로 무대 위를 내달린다. 떨구는 동작이 많은 한국적 춤사위와 하늘을 향해 도약하는 움직임의 발레가 엮이면서 예상밖 격정적인 움직임이 빚어졌다. 얼키고 설킨 춤이 이어지다 무대 위 여성 무용수가 쓰러지고 난 뒤, 남성 무용수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죽음이 갈라놓은 남녀의 사랑을 표현한 이 무대에서 많은 관객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비연 /사진. ⓒUniversal Ballet, Photo by Kyoungjin Kim
파가니니 랩소디와 맥도웰 피아노 협주곡 2인무에서는 무대 오른편을 백스테이지로 표현해 부상 당한 무용수를 출연시켰다. 유니버설발레단은 '더 발레리나'를 통해 발레라는 예술이 얼마나 어렵게 완성되는지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처럼 '더 발레리나'는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고 완성시키는 인간의 창조 활동인 '예술'과 그 가치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무대 위에서 빛나는 한 순간을 위해 얼마나 많은 무용수들이 수도 없이 넘어지고, 또 일어서는지를 통해서 말이다.

이해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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