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곡점 맞은 ESG 투자…주식 펀드서 54조 빠져나갔다

美·유럽서 투자금 순유출
1분기 ETF 30개 상폐되기도

연기금은 "장기 투자 최적기"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주식 펀드에서 올 들어 400억달러(약 54조원)에 달하는 투자금이 빠져나갔다. 저조한 투자 실적과 정치적 논란 등이 겹친 탓이다. ESG 테마 투자 열풍이 식으면서 옥석 가리기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9일 투자은행 바클레이스에 따르면 전 세계 ESG 주식 펀드에서 지난 4월 한 달 새 140억달러가 빠져나가는 등 올해 400억달러의 자금이 인출됐다. 미국에서는 지난해부터 전체 ESG 펀드 규모가 줄어들었고, 유럽은 올해 1분기 처음으로 ESG 주식형 펀드 투자금이 순유출됐다. ESG 상장지수펀드(ETF)는 지난 1분기 글로벌 증시에서 30개가 폐지됐다. 모닝스타에 따르면 지난해 72개 ETF가 폐지된 데 이어 올해는 이보다 더 많은 ESG ETF가 없어질 전망이다.

자금 이탈의 가장 큰 원인은 상대적으로 낮은 수익률이다. JP모간은 올 5월 낸 보고서에서 지난 12개월 동안 글로벌 지속 가능 주식 펀드는 11%의 수익을 냈으나 일반 주식 펀드는 21%의 수익률을 기록했다고 분석했다. ESG 투자 열풍은 2021년 최고조에 이르렀으나 이듬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급격히 위축됐다. 천연가스 등 원자재 가격이 치솟아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중앙은행들이 기준금리를 빠르게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화석연료 수요는 고금리와 인플레이션에도 끄떡없었고, 오히려 친환경 발전 프로젝트 등이 쓰나미에 휩쓸렸다.

상당수 ESG 펀드는 부진한 실적을 만회하기 위해 관련성이 떨어지는 기술주에 투자하는 등 편법을 동원했다가 감독당국의 철퇴를 맞았다. 독일 자산운용사 DWS는 지난해 ESG 원칙을 제대로 따르지 않고 투자자에게 ‘중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설명’을 했다는 이유로 미국 증권 규제당국에 1900만달러의 벌금을 물었다.미국에선 ESG 투자가 정치적 논란으로 번지고 있다.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 등 공화당 인사들은 “환경주의에 기운 운용사들이 ESG 관련 투자를 집행해 연금 재정과 국고를 축내고 있다”며 ESG 투자 원칙을 선언한 운용사를 보이콧하겠다고 위협했다. ESG 투자를 주도한 래리 핑크 블랙록 회장은 결국 “최근 ESG라는 용어가 완전히 무기화됐기 때문에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블랙록의 ESG 펀드 자산은 2021년 말 최고치인 250억달러에서 올해 5월 128억달러로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다만 연기금 등 기관투자가는 장기적 관점에서 ESG에 접근하고 있다. ESG 채권 펀드는 올해 4월까지 220억달러가 유입되는 등 13개월 연속 투자금이 늘었다. 일부 투자자는 저가 매수 전략에 나서고 있다. 니콜라이 탕겐 노르웨이 국부펀드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미국 CNBC방송 인터뷰에서 “우리는 (ESG 투자를) 장기 투자라고 생각한다”며 “다른 사람들이 그 부문의 투자를 줄인다면 더 나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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