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탄생의 종이 울렸다'…테크닉과 상상력의 피아니스트, 아르세니 문

피아니스트 아르세니 문, 첫 내한 리사이틀
라흐마니노프 라벨 등
회화적 성격의 작품들로 프로그램 구성
절묘한 테크닉과 탁월한 상상력…
지난 8일 서울 예술의전당. 2023년 부소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자 아르세니 문의 첫 내한 공연이 열렸다. 사실 부소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한국인 피아니스트들과도 인연이 깊다. 2021년 피아니스트 박재홍이 이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2015년에는 피아니스트 문지영이 우승을 차지한 콩쿠르기도 하다.

이번 리사이틀에서 아르세니 문이 고른 레퍼토리의 상당수는 지난 부조니 콩쿠르에서 골랐던 프로그램들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음악은 바로 라흐마니노프였다. 아르세니 문이 가장 편안하게 생각했을 작곡가였을 것이다. 작품의 흐름도 좋고, 큰 규모의 스케일과 복잡한 구성의 악곡 속에서도 라흐마니노프가 그리고 싶었던 정서가 명료하게 드러났다. 심플했지만, 감동적이었다. 아르세니 문의 연주는 대범한 스케일뿐만 아니라, 그 어딘가 황폐하고 아리기까지 했는데, 그 느낌은 단지 음반으론 잘 알 수 없는 것이었다.1부 마지막 프로그램인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 중 ‘스카르보’에서는 아르세니 문의 뛰어난 테크닉과 상상력이 절묘하게 버무려졌다. 아주 잘 훈련된 기술들도 보는 내내 놀라웠지만, 작품을 펼쳐내는 상상력은 더 대단하고 귀했다. 더 얻기 힘든 성질이다. 여러모로 어려운 이 작품을 부조니 콩쿠르에서 골랐던 이유도 이해가 되었고, 막상 눈앞에서 보니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2부 첫 곡인 드뷔시 ‘영상’ 중 ‘잎새로 흐르는 종소리’에선 1부에서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종소리와는 전혀 다른 드뷔시만의 종소리가 탄생했다. 종소리 뒤로 흐르는 베이스 멜로디가 짙게 부각되었는데, 확실히 두터운 베이스는 드뷔시 작품에 입체감을 더했다. 종소리는 말 그대로 흘러갔고, 노래는 더욱 도드라졌다.
마지막 프로그램은 ‘전람회의 그림’이었다. 앞선 작품들만큼이나 회화적인 성격을 가진 작품이다. 작품들마다의 특징들을 캐치해서 소리로 만들어 내는 과정들도 훌륭했지만, 소리의 세기와 울림을 통하여 원근감을 조절하는 모습도 탁월했다. 마치 먼 거리, 가까운 거리를 오가며 작품들을 조망하는 듯했다. ‘폴란드의 어느 부유한 유대인과 가난한 유대인’, ‘닭발 위의 오두막’은 인물들의 표정 변화까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가까이 보였고, 여리게 연주된 ‘고성’과 ‘키이우의 대문’의 도입부는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도록 연출됐다.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음악이 흥미로운 볼거리로 가득했다. 역시 음악의 완성은 기술이 아닌 상상력이었다. 관객들이 음악을 통해 갤러리를 다녀온 것처럼 느꼈다면, 아르세니 문의 연출 덕분이었다. 작품 곳곳에 숨어 있는 동양풍의 선율을 끄집어내, 음악이 단순히 회화적인 성격에만 그치는 작품이 아님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가 자라온 환경이 작품의 또다른 모습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이다. 러시아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고려인 아버지를 둔 아르세니 문은 이미 다양한 문화환경을 어린 시절부터 접해 왔을 것이다. 거기에 ‘키이우의 대문’까지 전혀 지치지 않고, 모든 음을 또렷하게 연주한 그의 체력도 놀라웠다. 2부 끝자락이었지만, 마치 막 연주를 시작한 사람 같았다.

연주가 모두 끝나고 4곡의 앙코르가 이어졌는데, 놀라운 건 마지막 앙코르였다. 프란츠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 가 연주되었다. 관객들은 첫 음이 시작되자마자 환호했다. 하지만 아르세니 문은 단순히 화려한 퍼포먼스를 노리기 위해 이 작품을 고르진 않았을 것이다. 분명 오늘 리사이틀의 흐름과 맥락을 고려한 선곡이었을 것이다. ‘라 캄파넬라’ 역시 바로 종소리기 때문이다. 1부에선 라흐마니노프의 음악 사이로 종소리들이 흘렀고, 또 라벨 ‘밤의 가스파르’ 중 ‘교수대’에선 라벨만의 종소리가 연주되었다. 이어서 2부에선 드뷔시의 ‘잎새를 스치는 종소리’가 공연장에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이처럼 여러 모습의 상상 속 종소리가 2시간 동안 곳곳에서 등장해왔다.

그렇다면 마지막은 가장 외향적이고 화려한 종소리로 마무리하기로 마음먹지 않았을까. ‘라 캄파넬라’는 폭발적인 효과와 함께 마무리 됐다. 화려한 작품이기 때문에 그 자체도 멋졌지만, 섬세하게 만들어진 저음부의 종소리는 더욱 인상적이었다. 고음부의 종소리보다도 더욱 신경 써서 연출됐다. 아르세니 문이 왜 마지막 곡으로 이 작품을 골랐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허명현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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