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득 변호사도 52시간?…재량근로 손본다

전문직 근로시간 제한 손질

업무 자율성 큰 고연봉 전문직
일반 근로자와 똑같은 잣대 의문

재량근로제 있지만 활용 낮아
정부, 활성화 위해 연구용역 발주
지난 4월 고용노동부에 국내 최대 로펌인 A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들의 근로시간 위반 여부를 조사해달라는 익명의 근로감독 청원이 들어왔다. 이 로펌 소속 변호사들이 근로기준법상 주 52시간 근무시간 상한을 넘겨 일하고 있다는 취지였다. 고용부는 구체적인 법 위반 혐의가 있는지 조사를 검토하고 있다. 고용부 관계자는 “업무 자율성이 크고 연봉이 수억원에 달하는 전문직에 일반 근로자와 똑같은 근로시간 잣대를 들이대는 게 맞는지 의문”이라며 “전문직엔 재량근로시간제도 등을 통해 유연하게 근무하는 관행을 활성화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재량근로제 손질 나선 정부

고용부가 유연근로제의 대표적 유형인 재량근로시간제도를 개편하는 작업에 본격 착수했다. 11일 관련 부처에 따르면 고용부는 지난달 말 ‘재량성·전문성 있는 업무에 대한 근로시간 규율 법안’을 주제로 연구용역을 발주했다. 재량근로제 개편을 위한 실태 조사와 제도 분석에 나선 것이다.1997년 도입된 재량근로제는 실제 일한 시간과 상관없이 근로자와 사용자가 합의한 시간을 근로시간으로 간주하는 제도다. 정확한 근로시간을 측정하기 힘들고 근로자 재량에 따라 업무 수행이 가능한 직종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회계·법률 등 전문직, 연구개발직, 기자, 프로듀서(PD), 정보처리시스템 설계자, 금융투자분석가·펀드매니저 등이 대표적이다.

재량근로제는 유연근로제 중 주 52시간을 넘겨 일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제도다. 탄력적 근로시간제, 선택적 근로시간제 등 다른 유연근로제는 특정한 주의 근로시간을 일시적으로 늘릴 수 있지만 전체 평균 근로시간은 주 52시간을 넘길 수 없다. 재량근로제는 문재인 정부 때 주 52시간 규제가 도입된 데 이어 2019년 한·일 무역 분쟁이 벌어지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연구개발 업종을 중심으로 주 52시간 제한을 풀어달라는 요청이 빗발치자 문재인 정부는 ‘재량근로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며 제도 활성화에 나섰다.

제도 활성화 용역 나서

하지만 활용도는 여전히 매우 낮다. 지난해 재량근무를 한 근로자는 31만6000명으로 전체 근로자의 1.4%에 머물렀다. 도입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롭기 때문이다. 재량근로제는 대통령령 등에서 정한 대상 업무만 가능하며 ‘사용자와 근로자 대표의 서면 합의’ ‘업무 수행에 재량성 보장’ 등의 요건이 필요하다.

고용부는 최근 발주한 연구용역을 통해 재량근로 도입률이 저조한 원인과 활성화에 필요한 법적·제도적 개선 방안을 파악하겠다는 계획이다. 정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고용부는 연구용역으로 재량근로제 대상 업무를 확대하고 불명확하다는 지적을 받는 재량성 보장 기준도 명확히 하는 방안을 검토한다. 전체 근로자 대표 대신 일부 부서의 근로자 대표를 따로 뽑아 동의를 받는 ‘부분근로자 대표제’를 도입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일각에선 22대 여소야대 국회에서 주 52시간 규제 완화가 골자인 노동개혁이 답보 상태에 빠질 것으로 예상되자 정부가 재량근로제 등 유연근로제 확대로 정책 방향을 선회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이후 미국의 ‘화이트칼라 이그젬션’(고소득 전문직의 근로시간 제한을 면제하는 제도) 도입을 추진해왔지만 법 개정이 필요한 사안이어서 도입이 어려워졌다. 하지만 재량근로제 확대는 시행령 개정으로 가능하다. 정상태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재량근로제 활성화는 전문직 중심 기업의 숨통을 터줄 것”이라고 말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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