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만 팔던 산유국의 역습…석유화학 '꿈의 설비' 8개 동시 건설

벼랑 끝 석유화학
(上) 중국 이어 중동까지 덮쳐…韓 석유화학 '진퇴양난'

석유 뽑아내 바로 제품 만든다

韓 6개 기업보다 많은 양 쏟아져
효자 수출품목 '장기불황' 터널로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중동은 그동안 산유국 지위에 만족했다. 가만히 있어도 ‘오일 달러’가 쏟아져 들어오는데, 굳이 석유화학제품을 만들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뽑아낸 원유를 한국과 일본, 미국 등 석유화학 강국으로 가는 배에 내줬다.

중동 산유국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10여 년 전부터다. 선진국들이 탈탄소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석유의 미래’가 어두워지자 새로운 먹거리 발굴에 나선 것. 범용 석유화학제품은 이들이 승부를 보기에 최적의 품목이었다. 원유를 뽑아낸 자리에서 곧바로 석유화학제품을 만들 수 있는 만큼 원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운송비를 아낄 수 있어서다. 원유 가공 과정을 확 줄인 정유·석유화학 통합 공장(COTC)이란 신개념 공장이 나온 것도 이런 결정에 한몫했다.
안 그래도 중국의 저가공세에 신음하는 국내 석유화학업계는 또 다른 강적을 맞은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생산원가 등을 감안할 때 범용 석유화학 시장에서 한국이 이길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며 “중국과 중동이 아직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으로 구조조정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생산원가 3분의 1에 불과

중동 석유화학 공장의 힘은 ‘꿈의 설비’로 불리는 COTC 공법에서 나온다. 생산 비용을 대폭 줄일 수 있어서다. 기존 업체들은 원유를 정제해 휘발유·경유·등유와 함께 화학제품 원료인 나프타를 만든다. 다시 나프타를 분해해 에틸렌·프로필렌 같은 기초유분을 생산한다. COTC는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원유에서 바로 기초유분을 만드는 방식이다.

석유화학업계에선 COTC 공법을 활용하면 기초유분 생산 비용을 30% 이상 낮출 수 있다고 분석한다. COTC를 도입한 중동 국가들의 에틸렌 생산 손익분기점이 t당 100달러 밑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는 t당 300달러 안팎인 한국, 중국의 3분의 1 수준이다.COTC의 장점은 또 있다. 원유에서 기초유분을 생산할 수 있는 비율이 기존 공법보다 훨씬 높다. COTC 공법은 보통 원유 10t에서 기초유분을 4~5t 만들 수 있다. 옛 공법을 쓰는 국내 석유화학업체는 이 비율이 8~10%에 불과하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는 이 비율을 80%까지 높이겠다고 공언했다.

○올해부터 공급 시작

중동의 석유화학 시설은 올해부터 2027년까지 순차적으로 문을 연다. 현재 중동에서 진행되고 있는 COTC 프로젝트는 총 8개다. 예상 에틸렌 생산량은 연 1123만t으로 LG화학 등 한국 주요 6개 기업의 생산량 연 1090만t을 웃돈다. 업계 관계자는 “5년 안에 한국보다 큰 석유화학 강국이 생긴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스타트를 끊은 건 지난달 부분 가동에 들어간 쿠웨이트국영석유화학회사(KIPIC)의 알주르 공장이다. 단일 공장으론 역대 최대인 370억달러(약 50조원)가 2030년까지 투입된다. 완전 가동에 들어가면 국내에서 벤젠 등 아로마틱스를 가장 많이 만드는 한화토탈에너지스(연 127만t)의 두 배가 넘는 276만t을 매년 쏟아내게 된다.아람코가 짓고 있는 세계 최대 COTC 공장인 얀부 석유화학 단지는 내년 가동에 들어간다. 에틸렌 생산량이 연 300만t으로 국내 1위 LG화학(330만t)과 비슷하다.

중동에서 생산한 석유화학제품이 시장에 풀리면 국내 기업들의 수익성은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다. 수요는 그대로인데 공급만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미 중국이 엄청난 물량을 시장에 쏟아내고 있는 탓에 석유화학업계의 수익성 지표인 에틸렌 스프레드(나프타 가격-에틸렌 가격)는 추락하고 있다. 12일 이 지표는 153달러로 4월 평균값(188.56달러)보다 18.8% 하락했다. LG화학 롯데케미칼 등 국내 6대 석유화학업체의 영업손실 규모는 작년(5668억원)보다 커질 수밖에 없다.

오현우/김우섭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