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뉴욕 맨해튼처럼…바젤 한복판 300평 밀밭을 심은 93세 할머니[여기는 바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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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바젤 대형 공공예술 프로젝트 '밀밭-대립'아트바젤의 본고장 스위스 바젤. 라인강에서 10분 거리, 도심 한가운데 있는 '메세 바젤'은 인구 20만 명의 도시에 매년 100만 명이 찾아오는 스위스 최대 규모의 컨벤션 센터다. 벌집 모양의 은빛 거대한 두 개의 건물을 연결하는 광장. 그 광장 위를 지붕처럼 연결하는 원형의 큰 덩어리는 중앙부가 뻥 뚫려 있어 마치 우주선에서 내려 새로운 공간으로 진입하는 것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스위스 바젤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 듀오 헤르조그 앤 드 뫼롱이 2013년 완공한 후 지금까지 미래형 광장의 표본으로 여겨진다. 지난 11일 개막한 제 52회 아트바젤에선 이 웅장한 건축물을 압도하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콘크리트로 뒤덮인 1000㎡(약 300평) 면적에 녹색의 밀밭이 펼쳐진 것. 이 작업은 아트바젤이 '메세플라츠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개최한 공공미술의 하나다. "환경을 생각하고 기후변화에 대응하자"는 식의 뻔한 메시지가 아니다. 이 프로젝트는 1세대 대지예술가이자, 생태예술의 시작점이기도 한 아그네스 데네스(93)에 대한 헌사다. 아그네스 데네스는 헝가리 태생의 미국 작가다. 아트바젤 메세 광장에 설치된 작품은 1982년 데네스가 뉴욕 로어 맨해튼(현 배터리 파크) 매립지에 8000㎡(약 2450평)에 달하는 밀을 심었던 '밀밭-대립(Wheatfield – A Confrontation)' 을 42년이 지나 재현한 것이다.
콘크리트 광장에 심은 300평의 밀밭
생태와 대지예술의 1세대 아그네스 데네스
뉴욕 맨해튼에 2000평 밀밭 심었던 1982년
'인류세' 용어 없었던 당시 환경과 생태 문제 지적
"내가 그리는 미래, 앞으로 500년은 더 걸릴 것"
데네스의 대지예술은 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뉴욕 설리번 카운티에서 '쌀, 나무, 매장'이란 제목의 퍼포먼스를 했다. 뉴욕 북부에 벼를 심고, 주변 나무들을 묶은 뒤 타임캡슐을 묻고 나서 "지구, 미래와의 소통에 관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지금이야 환경과 기후가 예술가들의 주요 화두지만, 1970년대 전후엔 누구도 환경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데네스의 경고가 지금 다시 재평가되고, 재논의되고 있는 이유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데네스는 나치 점령을 피해 가족과 함께 스웨덴을 거쳐 미국에 정착했다. 인간이 일으킨 전쟁으로 무너지고 파괴되는 것들을 목도한 그는 10대 때 이미 세계의 이주자들을 새에 비유한 '버드 프로젝트'로 환경철학적 작품을 내놓았다. 뉴욕 뉴스쿨, 컬럼비아대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캔버스의 제약을 느낀 뒤 다른 매체를 탐색하게 됐다. 땅과 자연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그의 작품들은 전 세계 갤러리와 박물관에서 600회 이상 전시된 바 있다. 1990년의 한 인터뷰에서 그는 "세기의 전환기, 그리고 다음 1000년은 척박해진 환경과 불안한 정신을 가져올 것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올해 아트바젤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인류는 항상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돌이켜보며 실수를 바로 잡는다"며 "처음 이 프로젝트를 할 때 정말 힘들고 지치고 가슴 아팠지만 보람찬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그의 작업들은 자연과 도시가 서로를 먹여 살리는 유기적 혼합체를 꿈꾼다. 밀밭 작업이 재현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런던 동부 버려진 철로 근처에서 한 차례, 그리고 밀라노 시내에서 각각 2009년과 2015년 전시됐다. 데네스는 그러나 "나의 야심찬 프로젝트를 모두 완성하는 데 앞으로도 500년은 걸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바라는 이상향은 초고층 빌딩 대신 '초고층 수직의 푸른 밭'을 도심에 만드는 것. 아흔 살이 넘었지만 여전히 이를 설계하고 구축하는 데 전념하고 있단다. 올해 아흔 셋이 되었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창의적인 상태가 되었다. 그가 꿈꾸는 미래를 앞당길 방법은 없을까. 짙푸른 밀밭 사이를 걸으며 노년의 예술가가 40년 전 가졌던 고뇌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씁쓸하다. 아트바젤은 16일에 끝나지만, '밀밭-대립에의 헌정' 설치 작품은 10월까지 계속된다. 바젤=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