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가게·증류소·교회 제단까지 길거리가 모두 갤러리로 [여기는 바젤]
입력
수정
아트바젤의 공공미술 실험 'Parcour'"18년간 이 가게를 운영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곳의 존재를 알게 된 적은 없었어요. 아트바젤이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아니네요." 지난 11일 스위스 최대 규모의 컨벤션 센터인 '메세 바젤' 인근의 잡화점 주인이 건넨 말이다. 이 가게의 이름은 '트로피칼 존(Tropical Zone)'. 아프리카에서 수입해온 각종 헤어 제품과 식재료들을 파는 공간이지만 6월 둘째주 만큼은 미술 애호가들이 들르는 전시장이 됐다. 아트바젤이 컨벤션 센터를 벗어난 도시 곳곳에 예술 작품을 선보이는 공공미술 프로젝트 '파르쿠르(Parcours)'의 한 장소가 됐기 때문이다. 런던 기반의 흑인 예술가 알바로 배링턴은 이 가게의 윈도우 마네킹 옆, 감자 등 채소를 파는 매대에 구조물을 설치해 자신의 작품을 걸었다. 파르쿠르는 프랑스어로 '여정'이라는 뜻. 아트바젤이 2010년부터 전시장을 벗어나 도시 곳곳 예상치 못한 장소에 예술 작품을 놓아두는 야외 공공미술 쇼다. 올해는 여러 곳에 흩어놓는 대신 처음으로 행사장 앞에서 라인강까지 이어지는 클라라슈트라세 길목을 활용해 22개의 예술 작품을 숨겨 놓았다. 말레이시아계 영국인 맨디 엘-세이그는 1980년대에 지어진 '클라라 쇼핑센터'에서 빈 상점과 레스토랑을 신문, 광고, 포장지, 중국의 모조 화폐 등 인쇄물로 뒤덮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공연자들은 마치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는 수행자처럼 춤을 추기도 했다. 작가는 돈과 정보의 순환뿐만 아니라 전 세계 많은 이들이 실제 옮겨다니는 이주의 현실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길가의 꽃집도 전시장이 됐다. '바쥬(Bajour)'라는 꽃집 앞에 흰 천을 두른 사람 크기의 마네킹이 서있는데, 그 안엔 필리핀 선원들이 작업하는 화물선의 경로, 나비의 이동 패턴 등이 수놓아져 있다. 스테파니 코밀랑의 작품이다.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남반구 등에서 스위스로 수입한 꽃들이 함께 진열됐다. 이 꽃들은 인기 있는 관엽 식물이 되었지만 원래는 식민지 개척자들에 의해 처음 유럽으로 들어온 경우가 많았다는 걸 의미한다. 스웨덴 작가 랩-시 램은 홍콩에서 스톡홀름으로 이주한 자신의 가족사를 소재로 작업하는 작가. 램의 할머니는 1970년대 홍콩에서 스톡홀름으로 이주해 가족을 위해 '뱀부가든'이라는 레스토랑을 열었다. 스웨덴 최초의 중국식 레스토랑이던 그곳에서 가족들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중국식 공간을 디자인하고, 서양인들의 취향에 친숙한 메뉴를 만들며 살아남아야 했다고. 이번엔 전 세계 요리가 모여있는 '클라라' 푸드코트에서 360도 비디오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그의 작품을 선보였다. 약 800년 역사의 성클라라 교회 안과 밖도 전시장이 됐다. 예술 생태학의 선구자이자 비평가였던 오스트리아 아티스트 로이스 와인버거(1947~2020)의 '휴대용 정원'은 교회 입구에 설치됐다. 1960년대 해외 여행 때 인기를 끌던 체크무늬 가방에 흙과 식물이 잔뜩 담겨져 있는데, 와인버거는 "내가 가는 곳마다 그 지역의 흙으로 각자 정원을 만들라"는 메시지를 던진 바 있다. 교회 내부엔 사제가 서는 제단 위엔 베트남 출신 베를린에서 작업하는 안 트란의 추상 회화가 걸렸다. 이밖에 레스토랑의 증류소, 오래된 호텔의 볼룸, 리모델링 공사 중인 건물의 한 켠과 지하 벙커, 바젤 의회로 통하는 지하 보도, 다리 위까지 22개 작품이 들어섰다. 올해 파르쿠르 섹션에 처음 합류한 스테파니 헤슬러 뉴욕 스위스연구소(SI) 소장은 "빈 상점부터 운영 중인 레스토랑, 차량 진입로까지 시민이자 소비자로서 가장 많이 상호작용하는 곳에 예술 작품을 선보이고자 했다"며 "5개월 이상 예술가, 장소의 원래 주체들과 소통하며 미니 비엔날레를 준비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바젤=김보라 기자
행사장인 메쩨 바젤~라인강 이어지는 길목
걸어다니며 누구나 즐기는 22개 작품 설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