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먹여살릴 연구하라"…515억 기부한 '벤처 개척자'

벤처 1세대 정문술 前 미래산업 회장 별세

나스닥 상장 韓 1호 기업 일궈
KAIST 거액 연속 기부 시발점
대통령 감사패·다산경영상 수상
미래산업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 고문으로 재직하던 2004년 서울 도곡동 사옥에서 기념 사진을 찍은 정문술 전 KAIST 이사장. /KAIST 제공
“돈(연구비)을 골고루 나눠 쓰지 말고 뛰어난 곳에 집중해라. 모방 연구는 하지 말고, 미래 국민을 먹여 살릴 연구를 해라.”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이 2001년 300억원을 KAIST에 기부하면서 이광형 당시 전산학부 교수(현 KAIST 총장)에게 당부한 말이다. KAIST의 발전을 이끈 최대 후원자로 꼽히는 정 전 회장이 13일 별세했다. 그는 국민은행 이사회 의장, KAIST 이사장 등을 지냈다. 향년 86세.1938년 전북 임실군에서 태어난 그는 남성고와 원광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박정희 정부 시절 중앙정보부에서 일했다. 1983년 반도체 장비 업체인 ‘미국 나스닥 상장 1호 한국 기업’ 미래산업을 창업해 한국의 벤처 1세대를 이끌었다.

반도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중앙정보부 근무 시절 일본에 갔다가 산 도시바 라디오에 적힌 ‘IC’(집적회로)라는 글자를 보면서였다. 1990년대 회사 비전은 사원들 스스로 정한다는 의미에서 ‘사훈과 조회, 출근부가 없는 기업’을 표방하며 벤처업계 근무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1999년 11월 미래산업을 나스닥에 상장시키며 부를 얻었다.

2001년 ‘착한 기업을 만들어 달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미래산업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엔 KAIST 후원에 매진했다. 이유는 1996년 맺은 이광형 당시 KAIST 교수와의 인연이 결정적이었다. 이 교수는 미래산업이 기술 중심 경영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1996년 제자 여럿과 함께 천안 미래산업 본사를 찾아 그를 만났다. 반도체 소프트웨어(SW)를 KAIST가 만들 테니 장비를 사용하게 해 달라는 제안이었다. 정 전 회장은 “기술이 없어서 너무 고생하던 시절, 참 반가운 만남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그가 2001년 기부한 300억원은 국내 최초 바이오기술(BT)·정보기술(IT) 융합학과인 바이오및뇌공학과 창설로 이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그해 6월 “사재를 과학기술 인재 양성에 써달라고 선뜻 내놓으셨다니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는 친서를 담은 감사패를 전달했다.

정 전 회장은 생전에 “한국이 선진국 문턱에서 머뭇거리는 것은 온 사회가 학연, 지연에 의해 굴러가고 끼리끼리 해 먹는 패거리 문화 탓”이라며 “나의 기부가 우리 사회의 병폐를 고치는 일에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KAIST를 기부 대상으로 점찍은 이유를 밝혔다.

정 전 회장은 2014년 215억원을 KAIST에 추가로 기부했다. 이는 과학기술 경영, 지식재산(IP) 등을 연구하는 문술미래전략대학원 확장 등에 쓰였다. 이수영(767억원) 류근철(578억원) 김재철(500억원) 등 KAIST ‘기부 릴레이’를 촉발한 것도 그의 업적으로 꼽힌다.2000년 반도체 제조 장비 및 로봇 장비 국산화와 수출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경제신문 다산경영상을 수상했다. 2014년엔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의 ‘아시아·태평양 자선가 48인’에 선정됐다. 유족으로 부인 양분순 씨와 2남3녀가 있다. 빈소 건국대병원, 발인 15일 오전 9시.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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