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 돌리고 고구마 구우며…'악마와 춤추라'는 스위스 최고 미술관

[여기는 바젤]
스위스 바젤 최고의 미술관 바이엘러의 파격
'Dancing with the Daemons(악마들과의 춤을)'

아트바젤 만든 바이엘러 부부의 소장품
현대미술 조합해 '움직이는 미술관'
계속 바뀌는 그림의 위치와 전시 제목
설치미술 기계 작동하며 소음과 냄새까지

샘 켈러 관장 포함 8명 큐레이터가 2년 기획
20명 이상 예술가 참여한 '살아있는 미술관'

야외 정원엔 필립 파레노 '멤브레인'
하얀 안개에 사라졌다 나타나는 미술관

"이 기획을 이해하려면 여러 번 방문할 것"
'아트바젤 2024'가 한창 열리고 있던 지난 13일. 스위스 바젤 시내에서 15분간 트램을 타고 외곽 리헨(Riehen)으로 향했다. 독일과 스위스 접경에 있는 한적하고 평화로운 동네. '바이엘러'라는 역에 내리자 얕은 담장이 맞이하는 미술관이 나타났다. '바이엘러 재단'의 자취는 담장처럼 소박하지 않다. 모네의 '수련'을 실제 연못 앞에서 바라볼 수 있는 갤러리이자, 지난 25년간 800만명 이상이 방문한 스위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미술관이라서다.

아트바젤 기간 동안 도시 곳곳에선 '바이엘러 재단-LUMA재단 5.19-8.11'이라는 검정 글씨의 포스터가 휘날렸다. 미술관에 들어설 때까지 무슨 전시인 지 도무지 알 수 없었는데, 입장을 하고 나서야 전시명이 'Dancing with Daemons(악마들과의 춤을)'라는 걸 알게 됐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는 전시명이 'Home for Strangers- 낯선 이들을 위한 집'으로 바뀌어 있고, 전시장에서 받은 안내문에는 'Cloud Chronicles'와 'All My Love Spilling Over-나의 사랑을 흩뿌려줘'라는 제목이 써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바이엘러 재단 영구 컬렉션들이 벽에 걸린 모습. 간격을 두지 않고 명작들을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전시됐다. 피에트 몬드리안, 엘스워스 켈리의 추상화 옆에 로니 혼의 올빼미 두 마리가 배치돼 있다. 그림들의 위치는 전시 기간 동안 여러 번 바뀐다. (c) Bora Kim

예술품들의 아름다운 묘지, 바이엘러

바이엘러재단 미술관은 1997년 지어졌다. 에른스트(1921-2010)와 그의 아내 힐디(1922-2008) 바이엘러가 400여 점의 소장품을 기증하며 설립됐다. 모네의 인상주의, 반 고흐의 후기 인상주의부터 피카소와 마티즈 등의 현대 걸작, 마크 로스코와 로이 리히텐슈타인, 앤디 워홀, 잭슨 폴록에 이르는 전후 거장, 안젤름 키퍼 등 동시대 예술가들의 주요 작품까지 그야말로 명작 중의 명작들이 영구 소장돼 있다.
전시장이 관람객들로 붐비는 가운데, 갤러리 직원들이 모네의 그림을 옮기고 있다. 컬렉션들은 전시 기간 동안에도 시도 때도 없이 위치를 여러 번 바꾼다. (c)Beyeler Foundation
바이엘러 부부는 세기의 컬렉터이자 아트딜러다.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절친이기도 했던 에른스트는 무엇보다 바젤을 예술의 도시로 만든 주역이다. 바젤의 작은 골동품 서점에서 일하던 에른스트는 주인이 작고하자 이를 인수해 갤러리로 만들고, 1970년 아트바젤을 처음 만들었다. 이탈리아 건축가 렌조 피아노에게 소장품들이 더 빛날 수 있도록 공간을 의뢰했고, 푸른 전원 풍경과 잔디, 정원과 자연 채광을 한껏 즐길 수 있는 공간이 1997년 완공됐다.

여기까지는 유럽과 미국의 명성 높은 미술관들과 큰 차이가 없겠다. 그런데 이곳엔 샘 켈러(57)라는 '천재' 기획자가 관장으로 있다. 샘 켈러는 예술을 배운 적도 없고,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다. 기업가에 가까웠던 그는 우연히 아트바젤의 디렉터로 일하다 아트바젤을 마이애미 비치로 옮기는 아이디어를 실행했고(2001년), "유럽 수퍼 박람회를 글로벌 더블 이벤트로 만든 천재"라는 찬사를 받으며 예술계에 진입했다.

에른스트의 요청으로 2008년 바이엘러 재단에 합류한 그는 올라퍼 엘리아슨, 폴 고갱, 프란시스 데 고야, 게오르그 바젤리츠, 조지아 오키프와 몬드리안 전시 등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에른스트는 생전 "예술은 영혼을 씻는 것"이라는 친구 피카소의 말을 인용하며 "이 미술관이 영원히 모든 예술품들의 아름다운 묘지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무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세대를 거듭해 누구나 찾아와 이들의 작품을 기념하고 추모하며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묵상의 장소가 되기를 바란 것.

21세기 미술관은 사람을 위한 곳

이번 전시는 샘 켈러가 8명의 세계적인 큐레이터들과 2년 간 머리를 맞댔다.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 공동 관장인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로슈의 상속녀이자 아를 박물관 단지를 운영하는 루마재단 설립자 마야 호프만 등이 참여했다. 예술가들의 면면은 더 화려하다.

현재 리움에서도 전시하고 있는 현대미술가 필립 파레노를 포함해 후지코 나카야, 피에르 위그, 리크리트 티라바니야, 구정아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유기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미술관을 만들자"고 뜻을 모았다. 큰 주제는 자연과 세계, 생태와 인간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샘 켈러 관장은 평소 "미술관은 관습을 깨는 곳이어야 한다. 20세기 미술관이 작품을 위한 곳이었다면, 21세기 미술관은 사람을 위한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왔다.
미술관 숲속에 설치된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작품을 보고 있는 관람객들. (c) Bora Kim
이번 전시에선 야외 정원에서 먼저 압도적인 광경이 펼쳐진다. 필립 파레노의 '멤브레인'(2024)은 미술관 연못 옆에 설치됐다. 외계에서 온 생명체같은 움직이는 거대한 탑. 검은 와이어로 연결된 투명한 물체가 상하 운동을 하는데, 커다란 확성기에서 개구리의 울음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그때 연못에선 뿌연 안개가 분사돼 모든 것을 가린다. 사람도, 작품도, 미술관조차도 연기 속에 사라지는데, 이것은 일본 예술가 후지코 나카야의 설치 작품이다.
약 10분에 한번씩 분사되는 물안개에 필립 파레노의 '멤브레인'이 가려졌다 나타난다. Fujiko Nakaya (*1933) Untitled, 2024. Philippe Parreno (*1964), Membrane, 2024, © Fondation Beyeler, Riehen/Basel
약 10분에 한번씩 분사되는 물안개에 필립 파레노의 '멤브레인'이 가려졌다 나타난다. Fujiko Nakaya (*1933) Untitled, 2024. Philippe Parreno (*1964), Membrane, 2024, © Fondation Beyeler, Riehen/Basel
박물관 앞 공원엔 온실이 하나 설치돼 있다. 나이지리아 예술가 프레셔서 오코오몬이 만든 신비의 온실이다. '태양은 아이들을 잡아먹는다'(2024)라는 제목의 이 전시장은 진달래, 가발 덤불 등 다채로운 식물이 채워져 있는데 얼핏 보면 예쁘지만 자세히 보면 독성 식물들이다. 이 독이 든 낙원에는 커다란 나비들이 실제로 날아다니고, 온실의 뒤편에 곰 인형이 하나 놓여 있다. 눈을 감았다 뜨거나, 팔을 들어올리는 등 초현실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프레셔스 요코오몬의 '태양은 아이들을 잡아먹는다', 2024 (c)Beyeler Foundation

베이컨을 보는 자코메티, 모네 수련 위 돌덩어리


실험적인 쇼는 전시장 안에서도 계속된다. 전통적인 박물관 작업의 경계는 로비에서부터 무너진다. 갤러리 직원들이 쉴새 없이, 그러나 조심스럽게 그림을 옮기는 장면에 사람들은 "잘못 들어왔나" 두리번 거린다.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대형 여성 조각 'Grand femmeⅢ과 Ⅳ'는 프랜시스 베이컨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여인을 기리는 3부작 '조지 다이어를 기억하며' 앞에 서있는데 이 사연을 아는 이들에겐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작품들이 예상 밖으로 배치되어 있으니, 사람들의 동선도 일정하지 않다. 앉아서 보고, 좌우로 움직이며 보고, 멀리서 보거나 가까이서 보는 등 모두가 움직이는 장면이 곳곳에서 연출됐다.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그랑드 팜므 3'(1960)이 프랜시스 베이컨의 '조지 다이어를 기억하며'(1971)를 바라보고 있다. 루돌프 스팅켈의 '무제'(2019)도 나란히 걸렸다. (c) Bora Kim
모네의 수련 (Le bassin aux nymphéas) 위에 떠있는 구정아 작가의 '불가사의 불가사리'(2024). (c)Fondation Beyeler
연못이 보이는 통창 옆에 있는 모네의 수련 (Le bassin aux nymphéas) 방, 그리고 마크 로스코의 작품 앞엔 구정아 작가의 검정 설치 작품 '불가사의 불가사리'(2024) 덩어리가 함께 한다.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가 달빛 쏟아지는 바다를 그린 1951년작 'Humboldt Current'는 울프캉 틸먼이 2010년대에 촬영한 행성의 사진과 같이 걸려 여운을 더하기도 했다.
왼쪽부터 Max Ernst- Humboldt Current(1951), Wolfgang Tillmans-Transit of Venus(2012)과 In flight astro (2010) (c)Bora Kim
눈치가 빠른 관람객들은 전시실 두어 군데만 돌아봐도 전시 도록 따위는 구겨넣고 관람에 집중한다. 아드리안 빌라 로하스의 '상상의 끝' 작품 연작은 나무와 인간, 로봇의 중간쯤 되어 보이는 설치물. 각각 세탁기, 전자레인지와 TV에서 파생된 작품들인데, 실제 세탁기가 작동되거나 전자레인지에서 직원이 고구마를 굽기도 한다. 작품에 뭔가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묻는 관람객들의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Beyeler Summer Show 2024. (c) Bora Kim
Adrián Villar Rojas (*1980), The End of Imagination VII, 2024, (c)Fondation Beyeler
사람들이 제일 오래 머무는 공간은 조각의 방이었다. 자코메티가 바라보는 피카소의 조각, 토마스 슈트의 조각과 브랑쿠시의 조각 등 세월을 거슬러 이미지의 유사성이 있거나 완전히 대조되는 작품들을 병렬 배치해 해석의 여지와 재미를 남긴다. 자연과 생태,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하려는 전시의 원래 목적처럼 작품과 작품 사이에서 잉태되는 새로운 에너지, 그것을 다르게 바라보는 관람자의 에너지가 끊임없이 교차했다.
Thomas Schütte, Frauenkopf(2006)과 마주하고 있는 Constantin Brancusi, L'oiseau, (1923)/ Fondation Beyeler
바이엘러 재단의 2024 여름 전시 'Dancing with Daemons' (c)Beyeler Foundation
이 전시에는 철학자, 무용가와 음악가도 참여했다. 이탈리아 철학자 페데리코 캄파냐는 지식이 보존된 책 800권을 선정해 눕거나 앉아 읽을 수 있는 '책의 사원'을 지었고, 앉거나 누워 노래하고 춤 추는 공연자들이 미술관 한 켠을 차지했다. 독일 예술가 카르스텐 횔러는 뇌과학 연구자 아담 하르와 어두운 동굴같은 침대를 만들어 (숙박 예약을 한 사람들에 한해) 전시장 내에서 잠을 잘 수 있도록 했다.

예술 작품에 대해 배경 지식의 너비와 깊이에 따라 이 전시는 누군가에겐 '인생 전시회'로, 누군가에겐 '기묘한 기획'으로 다가갈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시의 기획자들이 모토로 삼았다던 '모든 것은 흐른다'는 그리스 격언 '판타 레이(Panta rhei)'는 실현됐다. 미술관이 어디까지 변할 수 있는 지 그 실험의 끝을 보여준 건 확실해 보인다. 전시는 8월 11일까지다. 언제 방문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기억을 갖고 나올 수 있으니, 여러 번 다시 찾아도 좋겠다. 바젤(스위스)=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