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맛을 우려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요리든 인생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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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허남웅의 씨네마틱 유로버스요리에서 중요한 건 무엇일까. 신선한 재료, 셰프의 실력, 불의 조절, 재료에 걸맞은 소스 등과 더불어 숙성과 직결하는 ‘시간’을 빼놓을 수 없다. 영화 팬에게 <씨클로>(1996) <그린 파파야 향기>(1993) 등으로 잘 알려진 트란 안 홍 감독의 <프렌치 수프>(2023, 국내 개봉 2024년 6월 19일)는 요리를 통해 시간이 갖는 중요성은 물론 인생의 의미까지 묻는 음식 영화이면서 삶에 관한 드라마다. 마티유 뷔르니아의 만화 <도댕 부팡의 열정 (La passion de Dodin Bouffant)>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시작과 함께 요리를 하고, 음식을 먹는 장면을 30분에 가깝게 할애한다.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온 외제니(줄리엣 비노쉬)와 도댕(브누아 마지멜)은 10여 가지 요리를 만들면서 몇 마디 말도 나누지 않고 맡은바 조리를 척척 해낸다. 육수를 내고, 고기를 찌고, 그걸 다시 채소와 함께 굽고, 밀가루를 반죽하고, 크림을 만들고 하는 등의 과정이 오랜 시간 이어져도 외제니와 도댕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 하나 없다. 이 일이 천직이라는 듯 차분함과 안정됨이 두 사람 주변의 공기를 형성한다. 이들은 20년 넘게 요리를 함께해 온 동업자이면서 서로 사랑하는 인생의 동반자다. 도댕은 외제니와의 관계를 일러 ‘인생의 가을에 들어섰다’는 표현으로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는 둘만의 시간에 의미를 부여한다. 온갖 희로애락을 공유하며 돈독하게 구축한 관계답게 이들의 요리 또한 허투루 만들어지는 게 하나 없다. 간단하게 만들어 아침 식사로 먹는 오믈렛마저 수저를 사용해 크게 덜어내서 한입에 넣어야 맛을 음미할 수 있다는 철학을 견지하고, ‘시간’을 들여 익힌 와인을 음식에 따라 골라 둘 간의 조화와 화학 작용을 생각하며 늘 맛의 최대치를 즐기려고 한다. 외제니와 도댕에게 있어 재료 준비와 조리와 플레이팅과 식사와 이 모든 과정이 하나의 코스다. 여기에는 다음 음식을 기다리며 목을 축이는 와인 한 잔의 여유와 사적인 자리를 함께하며 나누는 친밀한 대화 등이 다 포함되어 있다. 이에 비견할 만한 인생의 행복은 많지 않다. 인생도 이와 같다면, 아니 코스 요리를 즐기는 태도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행복이 머릿속에 그리는 추상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구체적인 형태로 다가가 생이 기쁨으로 충만하고 축복으로 넘쳐난다.
트란 안 홍
음식에서, 관계에서, 경력에서 깊은 맛이 나오는 시간
그래서 도댕은 보채는 법이 없다. 오랜 시간 알아 오고 관계를 유지해 온 만큼 도댕은 결혼을 원하지만, 외제니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외제니는 원인 불명의 병을 앓고 있는데 19세기 말의 의학으로는 도무지 치료법을 찾을 수가 없다. 외제니는 그로 인해 도댕이 분담하게 될 고통을 전가하고 싶지 않고, 도댕은 좀 더 가까이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며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빠르게 대처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서로를 향한 신뢰와 희생정신은 그저 사랑한다고 나올 수 있는 감정이 아니어서 둘 사이의 깊은 맛은 외제니와 도댕이 함께한 시간의 두터움을 증명한다. 다만, 이들의 관계는 유한한 인간의 삶의 특성상 헤어질 수밖에 없는 게 운명인데 외제니와 도댕이 공유하는 요리 비법과 음식에 관한 철학이라면 다르다. 외제니와 도댕의 부엌에는 10대 초반의 수습생이 있다. 이 아이 이름은 폴린이다. 요리에 들어간 재료와 맛을 감별하는 데 천부적인 능력을 갖췄다. 외제니와 도댕은 부엌에서 쌓은 경험과 지식을 폴린이 이어주기를 바란다. 그들의 유산을 미래에 그대로 전승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요리의 발견은 새로운 별의 발견보다 행복에 더 크게 기여하죠.”라는 도댕의 말처럼 발전적으로 이어주기를 바란다.
인간의 생이 유한한 것과 다르게 역사와 유산은 대를 넘어 무한한 시간을 향해 나아간다. <프렌치 수프>가 여느 음식 영화와는 메시지를 달리하는 지점이면서 지난해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감독상을 받은 결정적인 이유였다. 트란 안 홍은 오랫동안 영화 팬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연출자이었다. <나는 비와 함께 간다>(2009) <상실의 시대>(2011) 등이 저평가를 받으면서 더는 예술영화와는 거리가 먼 감독으로 인식됐다. 이후로 긴 ‘시간’이 지나 <프렌치 수프>로 트란 안 홍은 다시 그의 이름을 알렸다. 결국, 요리에서든, 삶에서든, 경력에서든, 중요한 건 시간이다. 물리적인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흘러가도 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다루느냐에 따라 각자에게 부과되는 시간의 의미는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프렌치 수프>에서 인물을 비추는, 관계를 이어주는 카메라와 편집은 웬만해서 컷을 끊지 않고 되도록 오랜 시간을 끌고 간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요리에서처럼 기다릴 수 있고, 타인과의 관계로 공유할 수 있고, 자기의 능력을 쏟아부을 수 있는 때를 인내할 수 있다면 그에 걸맞은 결과가 따라온다. 그리고 거기에서 역사는 생성한다.
허남웅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