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탄대로 놔두고 오솔길"…40년 역상조각 외길인생 이용덕

토탈미술관서 '순간의 지속' 개인전
1984년 안과 밖이 뒤바뀐 '역상조각' 창안
미술계 '외길인생' 걸은 40년 화업 조명
청년 미술학도였던 이용덕(65)이 탄탄대로를 놔두고 오솔길을 걷기 시작한 건 1984년 무렵이다. 조각의 안과 밖이 뒤바뀐 '역상조각'(Inverted Sculpture)을 창안하면서다. '조각은 볼록하다'는 통념이 뿌리내린 국내 미술계에서 그의 작품은 '이상하다'는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용덕이 2014년 중국 베이징에 설치한 실루엣 조각 '만남-진술(Encounter-Submission)'. MDF판넬 500장을 이용해 제작한 이 작품은 전시 종료 후 다시 해체돼 원재료 상태로 돌아갔다. /토탈미술관 제공
한동안 역상조각을 세상에 공개할 자신이 없었다. 1986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우수상, 이듬해 대상을 거머쥘 때도 일반적인 양각 부조를 출품해야 했다. 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이다. 대상을 타면 유럽 견학 기회를 준다는 제안에 현실과 타협한 결과다.하지만 타고난 '반골 기질'은 꺾이지 않았다. 추상 조각 열풍이 휩쓸었던 1990년대에도 역상조각에 골몰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싸움을 하던 중 본인한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딱 하나의 작품만 만들고 죽는다면 뭘 할래?"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용덕 'sitting-140786' /토탈미술관 제공
그로부터 40여년이 흐른 최근. 이용덕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하는 전시 '순간의 지속'이 서울 평창동 토탈미술관에서 열렸다. 1980년대 작품부터 근작까지 조각과 드로잉 30점을 망라했다. 15일 미술관에선 그의 역상조각 40년을 돌아보는 학술 심포지엄이 열리기도 했다.

지난 3월 서울대 교수직에서 정년 퇴임한 그가 전업 작가로 복귀한 뒤 선보이는 첫 개인전이다. 일종의 회고전이냐고 묻자, 작가는 손사래 치며 이렇게 답했다. "회고전이 아닌 '시작전'에 불과합니다. 이제야 제가 어릴 적 꿈꿔온 작품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용덕 'attraction of the olympics', 1987. /토탈미술관 제공
멀리서 보면 볼록 나온 조각 같다. 가까이 다가서면 알맹이가 쏙 빠진 듯 움푹 패어있다. 좌우로 움직이면 조각 속 인물들의 시선이 따라붙는 듯한 시각적 혼란을 야기한다. 그의 작품을 본 한 어린이는 "사람이 빠져나간 것 같아요"라고 말했고, 정연심 홍익대 교수는 "비워짐과 채워짐이 공존하는 전이(轉移)의 공간"이라고 평가했다.

역상조각의 제작과정은 평범한 조각과 다르다. 반(半) 입체로 구현한 조각을 먼저 만들고, 이를 거푸집처럼 생긴 틀에 찍으며 완성된다. 음각으로 새겨졌을 때 보일 모습까지 상상해서 인체 비례를 계산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40년이 지난 오늘도 그의 방식을 남들이 섣불리 따라 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서울 남산에 설치된 안중근 의사상을 작업하는 이용덕 조각가의 모습. /작가 제공
서울 명동성당에 놓인 고(故) 김수환 추기경 상, 관훈클럽에 설치된 정주영·정신영 형제 상이 그의 손을 거쳐 역상으로 태어났다. 안중근 의사와 유관순 열사 등 수많은 역사적 인물을 조각했지만, 이용덕의 주요 관심사는 평범한 인물이다. 엎드려 한가롭게 편지를 쓰는 여자, 청소년들의 농구 시합 등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대상이다.작가는 "역상조각을 통해 사라져 가는 인물들의 과거를 저장하고 싶다"고 했다.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역상조각은 보는 각도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한다. 조각은 과거의 일순간을 재현한 것에 불과하지만, 이를 관찰하는 관람객을 통해 매번 새로운 형태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서울 용산구 로카우스(옛 용사의 집) 앞에 지난해 들어선 이용덕의 '위대한 결집'. /토탈미술관 제공
어린 시절부터 주변을 따뜻한 시선으로 관찰한 작가의 경험이 반영된 결과다. 서울 홍제동 개천가에서 나고 자란 작가는 진흙으로 탱크와 군인을 빚으며 놀았다. 이때의 기억은 지난해 서울 용산 로카우스 앞에 설치한 '위대한 결집'으로도 이어졌다. 직선 막대를 단순히 쌓아 올리는 기법만으로 4면에 형성된 군인 실루엣을 표현했다.

'인생 2막'이 시작한 지금, 전업 작가가 된 그는 경기 용인 작업실까지 달려가는 1시간 30분,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전부 작업에 매진한다고 한다. "이전까지 역상조각의 형식적인 측면을 탐구하는 데 그쳤다면, 앞으로는 감각적인 부분까지 섬세하게 다듬어나갈 계획입니다."
이용덕, 'writing', 2004 /토탈미술관 제공
숙원 사업을 묻자 '트랜스플랜트' 프로젝트를 꼽았다. 관악산 흙을 한 자루 떠서 일본에 옮겨심고, 거기서 새로운 흙을 퍼서 다른 나라에 이식하는 실험미술이다. 이리저리 이주를 마친 흙을 최종적으로 한국에 가지고 들어온다는 구상인데, 지난 1995년 관공서 허가를 구하지 못해 무산됐다.

또다시 오솔길을 걷겠다고 자처하고 나선 이유는 뭘까. "허가 절차가 쉽진 않겠지만, 그것까지 작업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역상조각은 결국 대상이 떠나고 난 빈자리에 새로운 관찰자가 들어온다는 원리를 가지고 있죠. 트랜스플랜트 프로젝트도 이런 철학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전시는 7월 7일까지다.
경기 용인 작업실에서 작업하는 이용덕 조각가의 모습. /작가 제공
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