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MZ들 "승진 해서 뭐하나…가늘고 길게"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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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진 좋은 건지 모르겠다'는 MZ 직장인"마음 같아선 '가늘고 길게' 다니고 싶어요. 일 잘해서 고속 승진해봤자 장점이 없어요."
직장인 54%가 '승진 생각 없다'
"이직·부업 등 대안 많아져"
재계 서열 기준으로 10대 대기업 중 한 곳에 사무직으로 근무하는 직장인 박모 씨(27)는 이같이 말했다. 회사에서 일을 잘해 성과를 인정받아봤자, 임원 승진 경쟁에서 밀리면 퇴사만 빨라질 뿐이라는 설명이다.박 씨는 "책임급이 되면 호봉제에서 연봉제로 바뀐다"며 "야근 수당도 제대로 못 받고 고과 평가가 안 좋으면 성과급도 바로 깎인다"고 말했다. 이어 "팀장님께서 공휴일에 출근하시는 것 보면 책임만 늘어나는 승진이 좋은 건지 잘 모르겠다"고 푸념했다.
워라밸(일과 생활의 균형)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직장인들 사이에서 승진에 대한 욕심도 사그라든 분위기다. 급기야 승진 대상자가 되더라도 '거부'하겠다는 목소리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HD현대중공업 노조는 올해 임금·단체협상(임단협)에서 '승진거부권'을 요구했다. HD현대중공업의 경우 생산직은 직위가 '기감'일 때, 사무직은 '책임'급부터 노조를 탈퇴해야 한다.노조 측은 승진해서 노조를 탈퇴해야 하는 직급이 될 때, 승진을 거부하고 노조원으로 남아있을 수 있게 선택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정년을 보장받는 노조원으로 남아 회사를 오래 다니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노조를 탈퇴해햐 하는 직위까지 오르면 임금체계도 기존의 호봉제에서 성과연봉제로 바뀌는데, 이 경우 같은 직위끼리 경쟁도 심화해 업무 부담까지 커진다. 승진거부권이 기업과 노조 간 협상 테이블에 오른 게 처음은 아니지만 지금까지는 '인사권 침해'라는 비판적인 여론이 더 많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직장인들 사이에서 승진거부권 요구에 공감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공기업에서 팀장으로 근무하는 40대 이모 씨는 "회사가 어려워지면 간부급 인사의 임금부터 줄인다"며 "지금은 월급이 깎여 후배보다 적은 월급을 받게 됐다"고 전했다. 이 씨는 "차라리 승진하지 않는 것이 나을 뻔했다"고 푸념했다. 2030 직장인들 사이에선 임원이나 승진을 포기한다는 의미의 '임포족', '승포자'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금융 대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김모 씨(27)는 "선배들을 보면 솔직히 '만년 차장'이 더 높은 직급으로 승진한 분들보다 편해 보인다"며 "차장까지는 연차대로 어느 정도 급여도 오르고, 책임도 많이 늘어나지 않아 선배들 사이에서 되레 승진을 꺼리는 분위기도 느껴진다"고 전했다.
대기업 직장인 이모 씨(26)도 "현충일에 회사가 다음날 연차를 권유해 목요일부터 주말까지 전 직원이 쉬었다"면서 "나중에 알고 보니 팀장님은 7일에도 출근하셨다"며 "대기업 팀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 5월 취업 플랫폼 기업이 진행한 설문에서도 이러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잡코리아가 1980년대 초에서 2000년대 초에 태어난 MZ세대 직장인 1114명을 설문한 결과 절반이 넘는 54.8%가 '임원 승진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이유로는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가 부담스러워서'라는 응답 비율이 43.6%를 기록해 가장 높았다.'임원 승진이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같아서'라는 응답이 20%, '임원은 워라밸이 불가능할 것 같아서'가 13.3%의 응답 비율을 보이며 뒤를 이었다.
기업 내에서 승진을 꺼리는 분위기와 관련, 이종우 아주대 경영학과 교수는 "월급만으로는 집을 마련하는 등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꾸리는 것이 힘들어지면서, 가족들과의 시간이나 여가 등 당장의 여유 있는 삶을 중시하는 문화가 생긴 지 오래"라고 진단했다. 이 교수는 "과거엔 직장에서의 성과에 목맸다면 요즘에는 '일을 덜 하는 대신 승진 경쟁에 참전하지 않겠다'는 식이다. 나름 합리적으로 판단한 결과"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최근에는 이직이나 부업을 통해 수입을 늘리는 사례도 많이 알려져, 승진 외에도 직장인이 택할 수 자기 계발법이 많아졌다"며 "승진이 요즘 직장인들에겐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일각에서는 개인의 노후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은퇴하면서 조성되는 사회적 불안감도 승진 거부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해석했다. 고속 승진을 해봤자 돌아오는 건 '이른 퇴직'이라는 이유다. 실제로 현대차·기아 노조는 만 60세 정년을 64세로, HD현대그룹 조선 3사 노조와 삼성그룹 노조연대, LG유플러스 제2 노조는 정년을 60세에서 65세로 늘려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김영리 한경닷컴 기자 smart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