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 타다오·프랭크 게리…'건축 거장들의 원더랜드' 비트라 캠퍼스를 가다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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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가구회사 Vitra 초대형 건축 실험실스위스 바젤은 프랑스, 독일 국경 사이에 자리 잡은 인구 20만 명의 작은 도시다. 바젤에는 수식어가 많다. 세계 최대 제약회사 노바티스와 로슈의 본사 등을 품은 제약의 메카, 50년 넘게 미술 시장의 패권을 잡아온 아트페어의 본고장, 최고의 시계 장인들이 대대로 모여 살았던 명품의 도시, 1년 내내 페어가 열리는 마이스의 도시다.
1950년 설립한 미국 가구 수입·유통회사
1981년 공장 전소 후 '건축 경연장'으로
프리츠커상 받은 스튜디오 5개 포진
공장과 어우러진 30개의 기념비적 건축물
니콜라스 그림쇼와 프랭크 게리가 80년대
1993년 안도 타다오의 첫 해외 진출작도
'페이퍼 건축가' 비난 받던 자하 하디드의 첫 작품
디자인 가구 7천여 점, 조명 1천여 점 박물관 소장
바젤은 현대 건축학도와 디자이너들이 가장 사랑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동네 작은 상점에서 탄생한 세계적인 가구회사 비트라의 '비트라 캠퍼스'가 도심에서 독일 국경을 조금만 넘어가면 나온다. 바젤에 간다면,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이 바로 여기다. 버스로 20분 거리, 바일 암마인에 있는 비트라 캠퍼스를 찾았다. 캠퍼스라는 이름만 들으면 학교를 떠올릴 수도 있다. 아니다. 이곳은 공장이다. 세계로 수출되는 비트라 가구의 90%가 여기서 만들어진다. 공장 건물과 사무실, 회의실 등은 체리나무가 드리워진 넓은 녹지에 툭툭 놓여있다.
이곳에서 눈길이 닿는 곳은 어느 하나도 그냥 지나치면 안된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현대 건축과 디자인의 기념비적 작품들이 그 안에 모두 모여있다. 버스 정류장, 주유소, 소방서, 산책로까지 모두 건축 거장들의 손길을 거쳤다.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들의 작품들로 가득 차있다. 큰 화재로 모든 공장이 불에 타버린 1981년, 비트라는 영국 산업 건축가 니콜라스 그림쇼를 시작으로 프랭크 게리(캐나다), 안도 타다오(일본), 자하 하디드(이라크계 영국), 헤르조그 & 드 뫼롱(스위스), 렌조 피아노(이탈리아), 알바로 시자(포르투갈) 등에게 결정적 작품들을 의뢰했다. 비트라 캠퍼스 투어를 하며 가장 놀라운 건 건축의 시점들이다. 지금이야 세계가 인정하는 거장이 된 건축가들이지만 이들이 비트라 캠퍼스를 위해 설계를 할 때만 해도 그리 유명하지 않았다. '비트라 캠퍼스가 프리츠커상의 예선 무대'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상상과 설계가 건축가의 일이라면, 그 건축을 완성하는 건 그곳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일. 어느 한 곳도 그저 뽐내기 위해 지어진 '죽은 건축'이 아니다. 가구를 만드는 공장으로, 전 세계로 수출하기 위해 머무는 물류창고로, 위대한 디자인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디자인이 바꾸는 일상을 그려보는 쇼룸으로 1년 내내 살아있다. 모든 공간이 쓸모를 위해 만들어지고, 그렇게 모든 공간이 유기적으로 순환하므로 이곳은 마땅히 건축가들의 원더랜드라 할 만하다. 비트라 캠퍼스는 서유럽 중심부에 있다. 스위스 바젤 시내에서 차로 약 20분. 독일 국경을 지나 라인강을 따라 자리한 농촌 마을 '바일 암마인'까지 가는 55번 버스가 바젤 바드역에서 시간마다 2대씩 다닌다. 버스 정류장에 내리면 그 풍경에 먼저 놀란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대부분 농경지이거나 곧게 뻗은 도로밖에 보이지 않아서다. 입구를 조금 지나면 꽃봉오리처럼 피어오르는 프랭크 게리의 백색 건축이, 짙은 회색의 매스들이 불규칙하게 쌓여있는 헤르조그& 드 뫼롱의 역작이 눈에 들어온다. 반 세기 넘게 산업단지였던 이곳이 어떻게 현대 건축물들의 성지가 되었을까. 이런 질문이 떠오르는 사람이라면 '비트라 건축 투어'를 추천한다. 비트라 캠퍼스는 비트라하우스의 쇼룸과 숍, 레스토랑과 카페, 정원 등을 아침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모두에게 무료로 공개한다. 드넓은 정원과 체리나무 그늘 아래 비트라의 상징적인 의자들이 툭툭 놓여있어 인근 주민들의 피크닉 장소로도 사랑받지만, 진짜는 공장 안에 있다. 이 공장 부지엔 일반인들이 들어갈 수 없고, 건축 투어를 신청한 사람들 (하루 80명 제한)에게만 공개된다. 두 곳의 뮤지엄 입장권을 포함한 건축 투어(1인 35유로)는 하루 네 번 열리는데, 12시와 3시 프로그램이 영어로 진행된다.
12개 매스로 쌓아올린 '집 위의 집'
비트라 하우스(2010)는 헤르조그& 드 뫼롱이 설계한 플래그십 스토어 겸 쇼룸이다. 바젤 출신의 1950년생 동갑내기 건축가 자크 헤르조그와 피에르 드 뫼롱은 비트라 디자인의 철학과 결정체들을 이 안에 다 모을 수 있도록 지었다. 유치원 때부터 친구였던 두 건축가는 2001년 프리츠커상 최초로 2명 동시 수상이라는 이례적 역사를 남기기도 했다. 육중한 매스들이 각자의 방향으로 뻗어나간 배열은 기존 건축의 문법을 뛰어 넘는다. 12개의 덩어리들은 최대 15m에 걸쳐 겹쳐져 있다. 다소 혼란스러워 보이는 모습이지만 이 기다란 건축물의 양 끝은 전형적인 집의 모양을 하고 있다. 안에 들어가 보면 더 놀랍다. 공간과 공간들이 극적으로 연결되고 흐른다. 중앙의 좁은 복도는 양 옆의 넓은 공간을 자연스레 구분하는데, 창이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보이는 나라가 다르다. 어디서 바라보면 독일의 땅이, 어디서 바라보면 스위스의 풍광이, 또 어딘가에선 프랑스의 하늘이 펼쳐진다. 계절마다 또 어떻게 달라질까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헤르조그& 드 뫼롱은 2016년 비트라 캠퍼스의 또다른 전시장 '샤우데포(전시하는 창고)'도 지었다. 고지식할 정도로 거대한 붉은 벽돌의 단순한 건축물은 창문 없이 아주 작은 문과 대조를 이룬다. 벽돌을 현장에서 반으로 쪼개 벽에 덧댔고, 재질만 다른 붉은 색의 벽돌 바닥재가 통일감을 더한다.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건물에 그려지는 그림자가 한 폭의 그림같다. 벽돌 건축을 잘 하지 않았던 헤르조그& 드 뫼롱은 1981년 화재 이전 비트라 공장이 대부분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는 점에 착안했다. 실제 전소되지 않은 유일한 건물이 샤우데포 옆에 남아있다. 이 건물이 디자인 유산을 영구 보존하기 위한 수장고가 비트라 컬렉션인만큼, 그 무게감을 더하는 건축 유산이다.'빌바오의 은인' F.게리를 유럽에 처음 알린 곳
비트라 하우스보다 먼저 이곳을 유명하게 한 이는 프랭크 게리(95)다. 죽어가던 스페인 북부 공업도시에 랜드마크 미술관인 구겐하임을 지어 '빌바오를 살린 건축가'라는 별명을 가진 캐나다 출신 거장은 미국에서의 명성과 달리 60세가 되었을 때 유럽에 처음 진출했다. 그의 유럽 데뷔작이 1989년 이곳 비트라캠퍼스에 지은 비트라 공장, 비트라 디자인뮤지엄, 그리고 게이트다.겹겹의 목련이 꽃피듯 곡선과 직선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비트라 속 그의 유산들은 이후 그를 상징하는 최근 건축물들에 비해 더 절제되고 소박하고, 동시에 영롱하다. 비트라를 시작으로 유럽 전역에서 그에게 건축을 의뢰하면서 건물을 더 자유로운 형태로 구기고 접는 해체주의 건축의 황금기가 열렸다.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1997), 미국 LA 월트디즈니콘서트홀(2003), 스페인 엘시에고 호텔 마르케스 데 리스칼(2005), 체코 프라하 댄싱하우스(1996), 파리 루이비통재단미술관(2015) 등의 씨앗이 비트라에 있는 셈이다. 게리는 대형 도시 랜드마크에 몰입하던 2003년 비트라 캠퍼스로 돌아와 자신의 뮤지엄 옆 또 하나의 소담한 백색 갤러리를 열었다.안도 타다오 빛의 건축도 일본 밖 첫 여행
일본이 낳은 세계적 건축가 안도 타다오(82)의 명성도 이곳에서 시작됐다. 노출 콘크리트와 빛만을 활용해 자연에 가장 가까운 건축을 하는 그는 1993년 비트라로부터 "회의실을 지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일본 밖 첫 건축 프로젝트였다.온통 체리 나무로 둘러싸인 프랭크 게리의 건축물 옆, 그는 낮은 높이의 절제된 노출 콘크리트 벽면을 세워 '컨퍼런스 파빌리온'을 설계한다. 건축을 위해 오로지 단 세 그루의 나무만 베어내고 마치 일본의 신사로 향하는 입구처럼 좁고 긴 복도를 'ㄴ자'로 설계했다. 게리의 기하학적 건축물과 대비되는 좁고 낮은 문을 통과하면 비로소 '빛의 공간'이 열린다. 낮은 지반을 더 높이는 일반적 건축의 방식과 달리 1층의 공간을 더 파내려가 회의실에 앉아 있으면 시선에 풀숲과 나무의 중심부가 걸려든다.문의 너비를 90㎝로, 전원 스위치의 높이도 일반적인 유럽 규격보다 더 낮게 설계한 뒤 천정의 마감을 일본 다다미방의 규격 사이즈 그대로 가져와 배열했다. 회의실을 지나는 사람들이 서로 방해받지 않게 내부의 동선은 철저히 일방향으로 통한다. 1명만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복도를 지나면 건물의 뒤편으로 크게 뚫린 빛의 광장이 나온다. 안도 타다오는 이 건물을 설계하고 2년 뒤인 1995년 하얏트 재단의 프리츠커 건축상을 수상했다. 바일 암마인·바젤=김보라 기자[2부에서 계속] ▶▶▶악동의 소방서, 60년대 일본집… 세계 건축 유산 다 모은 비트라 캠퍼스를 가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