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거장' 플레트네프 "저는 청중을 위해 연주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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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러시아 명피아니스트 미하일 플레트네프러시아 출신 미하일 플레트네프(67)는 1978년 스물한 살의 나이로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둔 명피아니스트다. 세계 클래식 음악계에서 ‘20세기 피아노의 거장’을 꼽을 때 언제나 빠지지 않는 음악가로도 유명하다. 기존 틀에서 벗어난 독보적 해석과 섬세한 표현, 명료한 타건으로 순식간에 듣는 이의 혼을 빼놓는 연주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외신의 입을 빌리자면 그는 ‘현존하는 피아니스트 중 가장 독특하고, 색다르게 비범한 인물(미국 뉴욕타임스)’이자 ‘경이로운 비르투오시티와 놀라운 상상력을 타고난 피아니스트(영국 더 타임스)’다.
"음악가는 자신의 한계 끊임없이 뛰어넘어야"
27~28일 서울 예술의전당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 연주
"청중 아닌 나를 위해 연주…모든 힘 쏟아내"
"아무도 듣지 않으면, 그래미상도 의미 없어"
러시아 피아니즘의 계승자인 플레트네프가 한국을 찾는다. 오는 27~2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KCO·타카세키 켄 지휘)와 함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1~4번)을 두 차례에 걸쳐서 연주한다. 플레트네프는 공연을 앞두고 진행한 서면 인터뷰에서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악보에 쓰고, 연주한 모든 음표는 단 하나도 쉽게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며 “어릴 적엔 (전설적인 피아니스트였던)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 자체가 큰 도전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어느 순간부터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연주를 표면적으로 흉내는 낼 수 있지만, 그런 연주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피아니스트로서 무슨 수를 써도 그만의 색깔, 서정 같은 고유의 음악적 특성은 절대 따라 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이제 전 라흐마니노프의 그 어떤 것도 흉내 내지 않습니다. 그저 그의 음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저의 사상과 시각으로 그의 음악을 생생하게 풀어내는 데 몰두합니다. 이번에도 역시 그런 연주를 들려줄 겁니다.”
플레트네프는 수많은 명반을 보유한 피아니스트로도 유명하다. 1996년에는 ‘스카를라티 소나타’ 음반으로 영국 그라모폰상을 받았고, 2005년엔 프로코피예프의 ‘신데렐라’를 두 대의 피아노 모음곡으로 편곡한 앨범을 통해 미국 그래미상을 거머쥐었다. 40여년간 세계 최정상 자리를 지켜온 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음악 할 때만큼은 매우 엄격하다”고 했다. “음악가는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전 매일 제가 할 수 있는 수준보다 두 배, 세 배 더 많은 것들을 스스로에게 요구해왔습니다. 그래야만 조금씩이라도 실력이 발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그에게 무대 위에서 주로 하는 생각을 묻자, “연주할 때만큼은 공연장에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려 노력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전 청중을 위해 연주하는 게 아닙니다. 저 자신을 위해 연주하고, 음악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그 시간을 확장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아붓습니다. (굳이 청중의 존재를 곱씹지 않아도) 그들의 반응은 나에게 언제나 큰 에너지를 주고, 그들이 몰입할수록 나의 집중력이 높아진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플레트네프는 피아니스트뿐 아니라 지휘자로서도 세계적 반열에 오른 몇 안 되는 음악가 중 하나다. 1990년 창단한 러시아 최초의 민간 악단인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RNO)를 30여년간 이끌면서 세계 정상급 악단으로 성장시키고, 2022년에는 라흐마니노프 인터내셔널 오케스트라(RIO)까지 창단한 인물.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사실 거창한 목표나 계획 따윈 없어요. 앞으로도 지휘와 피아노 연주를 가능한 길게, 여력이 되는 데까지 해나가고 싶습니다. 서 있기 힘들다면 피아노에 앉고, 앉는 것이 힘들다면 지휘대에 서는 식으로요. 단지 하나 더 바랄 수 있다면 사람들이 제 음악에 계속 흥미를 느끼고 들어줬으면 좋겠습니다. 500번의 그래미상을 받아도, 아무도 듣지 않는다면 음악으로서의 의미는 사라질 테니까요.”
끝으로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밝히는 일도 잊지 않았다. “전쟁은 누가 시작했든지, 누가 옳고 그르고를 떠나 범죄입니다. 복수에 대한 열망으로 시작되는 전쟁은 그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습니다. 그 악순환을 끊기 위해선 무언가 좋은 일을 해야 하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좋은 일은 음악뿐입니다. 앞으로도 전 계속 음악으로 마음을 전할 겁니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