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이 있어야 전쟁도 하고, 돈도 버는 거 아닙니까" [서평]

역사는 돈이다

강승준 지음
잇콘
540쪽│3만3000원
"명분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영화 '범죄와의 전쟁'(2012)에서 조폭 두목을 연기한 하정우가 싸움에 나서기 전 내뱉은 대사다. 본심은 부산의 나이트클럽 운영권을 독점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체면치레를 위한 포장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영화 속 깡패들만 명분 싸움에 골몰하는 건 아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표면적으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진을 막겠다는 명분을 앞세웠다. 오늘날 한국은 어떤가. 의대 증원을 반대하는 입장에 대해선 '명분 없는 집단 휴진 철회하라'란 비판이 먼저 제기된다.
/게티이미지뱅크
과연 그럴까. 신간 <역사는 돈이다>는 "정치·외교·군사 등 모든 영역을 움직인 건 명분이 아닌 실리"라고 말한다. 위선 가득한 명분 뒤편엔 늘 주판알이 분주하게 튕겨왔다는 주장이다. 러시아의 침공도, 의사들의 휴진도 결국 '돈' 때문이란 얘기다.

책은 부(富), 화폐, 금융 세 가지 관점에서 인류의 반만년 넘는 역사를 재해석한다. 자유와 평등, 평화 등 이상적인 담론이 아닌 지극히 차가운 이해타산에 기반한다. 경제 관료를 거쳐 현재 한국은행 감사로 일하는 강승준 저자의 현실주의적인 시각이 녹아든 결과다.이야기는 기원전 5000년 무렵 메소포타미아에서 출발한다. 문명의 시발점인 문자의 탄생부터 회계장부에서 기원했다. 생산성이 높아지며 잉여생산물이 축적됐고, 인류는 이를 교환하기 시작했다. 진흙에 쐐기 모양으로 '외상값'을 기록한 게 문자의 시작이다.
&lt;역사는 돈이다&gt;(강승준 지음, 잇콘, 540쪽, 3만3000원)
권력 전복의 순간에는 늘 돈이 있었다. 로마의 최고 지도집단인 원로원이 카이사르를 살해한 것도 자신들의 부와 특권, 특히 화폐주조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자유·평등·박애'란 숭고한 가치를 울부짖던 프랑스혁명은 어떤가. 저자는 프랑스 왕실의 사치스러운 지출장부가 공개된 게 혁명의 원인이라고 본다.

종교나 인권처럼 신성불가침한 영역들을 거침없이 파고든 점이 흥미롭다. "나사렛 땅의 세금 인상이 없었으면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건 부족한 세수(稅收)를 메우기 위해서였다. 미국 남북전쟁은 노예해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국의 관세 인상에 대처하기 위해 촉발됐다."고대와 중세, 근대를 다룬 전반부는 역사서에 가깝다. 브레턴우즈 체제 이후를 다룬 현대부터는 대체로 경제사를 다룬다. 경제학 배경지식이 부족한 독자라면 책 후반부를 읽을 때 다소 어렵다고 느낄 수 있겠다.

안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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