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노출 콘크리트' 건축의 선구자였던 안도 타다오가 일본 밖에서 첫번째 프로젝트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 독일 비트라 캠퍼스 안에서 노출 콘크리트 건물이 지어지고 있었다.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의 비트라 캠퍼스는 가구 브랜드 비트라의 본사와 공장 그리고 뮤지엄이 한데 있는 공간이다. 비트라 캠퍼스의 노출 콘크리트 건물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유작으로 남긴 여성 건축가 최초의 프리츠커상 수상자, 자하 하디드(1950-2016)의 소방서였다. 불에 탄 공장을 재건한 뒤 화재 예방에 힘 쏟던 비트라는 1990년 무렵 자체 소방서를 짓기로 한다. 이때 선택한 건축가가 자하 하디드다.
'도면 건축가' 놀림 받던 자하 하디드의 첫 건물
자하 하디드의 도면을 현실에 옮긴다는 건 그 자체로 모험이자 도전이었다. 이라크 바그다드 출신으로 영국 AA에서 렘 쿨하스를 사사한 하디드는 이때까지만 해도 '건축물 없는 건축가'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설계도로 공모전마다 크게 인정 받았지만, 이를 실제 건물로 실현시킬 건축주는 아무도 없었다. 마흔 살 넘어서까지 인테리어, 제품 디자이너로만 활동하던 그에게 비트라 소방서는 첫 시험 무대이자, 첫 준공작이 됐다. "상상 속에만 있을 법한 도면이 건축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걸 세상에 검증한 사례이기도 했다.
중력에 떠있는 듯한 지지대들, 사선과 사면으로 구성돼 얼어붙은 콘크리트 같은 날카로운 외관, 실내에선 어떤 공간에서도-심지어 바닥면에서도-수평이나 수직을 찾아볼 수 없는 과감한 건물. 주변엔 수평으로 거대한 공장 건물들이 늘어서 있어 비정형의 건축물이 더 돋보인다. 선명한 가장자리와 모서리들은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길 반복해 한참을 봐도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다. 내부는 화장실마저도 벽면이 사선으로 기울어져 있다. 한시도 긴장을 풀지 말라는 건축가의 의도였을까. 실제 소방관들은 "10분만 앉아있어도 멀미가 난다"는 불평을 매일 했다고. 2년 뒤 공장과 600m 거리에 공공 소방서가 생기며 이 소방서는 폐쇄됐다. 지금은 이벤트와 전시 공간으로 쓰인다. 평가야 어떻든 비트라 캠퍼스에서의 실험이 주목받으며 하디드는 심장마비로 별세하기 전까지 40여개국에서 200여 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건축 미학이 만든 공장의 신세계
비트라 건축 투어의 핵심은 산업 건축에 있다.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업용·주거용 건축물이 아닌 혁신적인 첨단 공장 건축의 끝을 볼 수 있어서다. 영국의 하이테크 건축가 니콜라스 그림쇼(84)는 비트라 공장 화재 직후인 1981년과 1983년 두 개의 공장을 지었다. 그는 가장 값싼 대량생산 소재로, 가장 빠르고 튼튼하게 공장을 건축하기로 이름난 장인. 수평의 견고한 공장은 당시 6개월마다 하나씩 완공돼 화재 후 1년 만에 공장을 다시 가동할 수 있게 했다. 그림쇼의 건축물의 완공 이후 프랭크 게리의 공장(1989), 알바로 시자의 공장(1994), 일본 건축그룹 SANAA의 물류창고(2012)가 잇따라 개관했다. 건축가들은 상대 건축가의 작품을 방해하지 않는 어울리는 건축을 고민했다. 알바로 시자(90)는 비트라의 역사 속 공장을 재현하기 위해, 붉은 벽돌의 공장을 세웠다. 뾰족하게 치솟은 하디드의 공간에 중립적인 배경을 만들어 주고자 한 선배의 배려이기도 했다. SANAA는 수평의 두 공장 앞에 수직으로 물결치는 거대한 원형의 물류창고를 지었다. 기존 물류 창고를 일부 허물고 지으면서 반원을 2006년에, 나머지 반원을 2009년에 완성해 물류창고가 멈추는 일은 없었다고. 이 물류창고와 알바로 시자의 건축물 사이엔 이동식 지붕이 하나 설치돼 있는데 그 원리가 재밌다. 날이 맑을 땐 다른 건축물에 방해되지 않으면서 물류 차량이 원활하게 지나다닐 수 있도록 하늘 높이 떠있다가 비가 오면 자동으로 수직 하강해 4m 높이까지 내려온다.
작지만 소중한 건축 유산들의 안식처
비트라 캠퍼스의 건축물 중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인류의 유산으로 남을 만한 것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렌조 피아노(86)는 6㎡의 공간 안에 모든 기능이 들어있는 초소형 생활 주택 디오게네(2013)를 남겼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 디 시노페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인데, 세속적인 사치품을 혐오한 그는 통 속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 실용주의 디자인의 선구자 장 프루베와 그의 형제 앙리가 1953년 디자인한 최초의 대량생산 주유소도 2003년 이곳에 놓여있다. 정유회사 토탈이 의뢰해 만든 모듈식 주유소는 당시 3년 만에 프랑스 전역에 100여 개가 설치됐던 작품. 현재 남아있는 3개의 주유소 중 하나다. 단게 겐조와 함께 20세기 후반 일본의 가장 중요한 건축가 시노하라 가즈오(1925-2006)의 초기 걸작 중 하나인 도쿄의 '우산집'(1961) 역시 캠퍼스의 들판 위에 서있다. 정사각형 구조의 목조 주택으로 피라미드 형태의 지붕이 얹어져 있다. 외관에 시멘트 섬유판같은 간단하고 저렴한 재료를 사용해 1960년대 일본의 건축 담론을 바꾼 소형 주택. 2020년 도로 건설로 인해 철거 위기에 처하자, 비트라는 이 집을 구입해 2020년 조심스럽게 해체해 비트라 캠퍼스로 옮겨왔다. 도쿄공과대와 협업해 약 1년간 복원했고, 2022년부터 캠퍼스에 놓였다. 90년 역사의 캠핑카 브랜드 '에어스트림'의 1968년형 트레일러는 네바다의 트럭 운전사에 의해 발견된 이동식 키오스크. 2011년 복원해 비트라가 소유하고 있으며 여름철마다 테이크아웃 레스토랑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야생 정원 속에 초소형 초가집
요즘의 비트라 캠퍼스는 자연과 어우러지는 건축으로 여전히 진화 중이다. 비트라 하우스 뒷편, 4000㎡에 달하는 '우돌프 정원'은 네덜란드 정원 디자이너 피에트 우돌프가 2020년부터 꾸미고 있다. 뉴욕 하이라인, 런던 서펜타인갤러리, 베니스비엔날레 커미션 등 전 세계 공공 정원 디자인을 맡은 정원사는 3만여 종에 달하는 야생의 식물들을 균형있게 조화시켜 1년 내내 신비로운 정원을 가꿔가고 있다. 이곳의 정원사들이 편히 쉬고 장비를 보관할 수 있는 '테인 가든 하우스'는 파리에 거주하는 일본 건축가 츠요시 테인이 지난해 건축했다. 8명이 들어가는 15㎡ 크기의 집은 돌, 나무, 초가, 밧줄 등 자연의 재료만을 사용해 야생 정원 곁에 한몸처럼 서있다. 텃밭과 양봉장을 곁에 두고 있는 외부 계단을 따라 지붕 위에 오르면 정원의 전경과 비트라 캠퍼스의 주요 건축물들이 360도로 펼쳐진다.바일 암라인(독일)=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