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원숭이 묘사'로 일본 발칵…그들이 몰랐던 사연이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문명 모르는 미개인?
편견 깨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
일본 밴드 미세스 그린 애플의 '콜롬버스' 뮤직비디오. 현재는 삭제된 상태다. /유튜브 캡처
“그 많은 회사 관계자 중에 역사 공부를 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나요?”

지난 12일 일본 인기 밴드 ‘미세스 그린 애플’의 신곡 뮤직비디오가 인터넷에 공개되자 댓글 창은 이런 비판으로 뒤덮였습니다.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그랬을까요.신곡 제목은 ‘콜럼버스’. 뮤직비디오는 콜럼버스·나폴레옹·베토벤 등 유럽 역사 속 인물로 분장한 밴드 멤버들이 ‘원숭이가 사는 섬’에 상륙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밴드 멤버들은 원숭이들의 집에 찾아가 그들에게 말 타는 법과 피아노를 연주하는 법 등 ‘문명’을 가르칩니다. 원숭이들에게 인력거를 끌게 하는 장면도 있지요. 이를 두고 “미국 원주민을 열등한 존재로 표현했다” “미 원주민을 학살하고 노예로 팔아치운 콜럼버스를 미화했다” 등의 비판이 빗발쳤습니다.
해당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영국 BBC 등 세계 각지 언론에서 사건이 화제가 되자, 다음날 발매사인 유니버설 뮤직 재팬은 사과하고 동영상을 비공개 처리했습니다. 밴드 멤버들도 사과문을 올렸습니다. “잘 몰라서 그랬다”는 내용인데, 실제로 인종차별을 의도하고 벌인 일은 아닐 거라는 해석이 많습니다. 이 곡이 미국에 본사를 둔 코카콜라와의 컬래버레이션 곡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지요. 하지만 씁쓸함은 여전합니다. 제작 과정에서 그 내용이 문제가 될 거란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는 얘기니까요.

그러던 참에 공교롭게도 지난 18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북미 원주민의 문화와 역사를 깊이 있게 소개하는 특별전이 개막했습니다. 제목은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 북미 원주민과 관련해서 최고로 꼽히는 박물관인 미국 덴버박물관 소장품을 대거 빌려온 전시인데요. 국내에서 이 주제로 전시가 열리는 건 처음입니다.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이 전시를 기회로 삼아, 북미 원주민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보려 합니다.

북미 원주민, 한국인과도 먼 친척?

존 모이어스의 '말 문화의 일몰'(2006). 말을 키우며 살아가는 전형적인 북미 원주민의 이미지를 표현했다. /덴버박물관
대평원에 살던 원주민 부족의 보금자리 '티피'. 우리나라에서 보통 '인디언 텐트'라고 부르는 형태다. /국립중앙박물관
‘인디언’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인디언 텐트’나 디즈니 애니메이션 ‘포카혼타스’를 떠올리는 분도 있을 것이고, 과자 이름이 떠오르는 분도 있을 겁니다. 대체로 떠오르는 그림은 이렇습니다. 긴 털 깃 모자를 쓰고 말을 달리며 화살을 쏘고 텐트를 치는, 먼 대륙의 사람들. 전시 초입에서 만날 수 있는 텐트 ‘티피’가 바로 그 텐트입니다.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북미 원주민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한국이나 중국이나 일본이나 아시아인은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착각입니다. 우리나라의 수십 배가 넘는 넓이의 북미 대륙, 이곳에서 살았던 부족은 570여개에 달합니다. 지역마다 전혀 다른 집의 종류를 보면 체감이 확 될 겁니다. 눈으로 만든 ‘이글루’, 일종의 내무반 형태의 삼나무 판잣집 ‘플랭크하우스’, 건조한 기후에서 진흙으로 만든 ‘어도비’처럼요.
북미 원주민은 드넓은 대륙 곳곳에 퍼져 살며 수백개의 부족을 만들었고 다양한 문화를 일궈냈다. 기후와 지역이 다른 만큼 이들은 정체성도, 생활하는 공간의 모습도 서로 달랐다. 지역별 대표적인 주거양식을 표시한 그래픽. /국립중앙박물관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걸 알기 위해 일단은 북미 원주민의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사실 북미 원주민들은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들의 조상은 기원전 2만년 전쯤 아시아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들이거든요. 그렇다고 바다를 건너간 건 아니었습니다. 뚜벅뚜벅 걸어서 갔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을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머나먼 옛날, 지금의 러시아 극동과 아메리카 대륙의 알래스카 사이에는 두 대륙을 잇는 길이 종종 열리곤 했습니다. 빙하기로 물이 얼어붙으면서 해수면이 내려갔고, 이에 따라 낮은 지역의 땅이 물 밖으로 드러난 건데요. 이 지역을 베링 육교(陸橋, land bridge)라 합니다. 이 길을 통해 아시아 지역에 살던 사람 중 일부가 이 길을 통해 알래스카로 건너가면서 북미 원주민의 조상이 된 겁니다. 이런 이동은 길이 열릴 때마다 몇 번씩 되풀이됐습니다.
아시아 대륙의 인류가 아메리카 대륙에 유입된 경로.
사람뿐 아니라 동물들도 이 길을 통해 아시아와 아메리카를 오가곤 했습니다. 그중 가장 재미있는 사례가 낙타입니다. 의외로 낙타의 고향은 북극에 가까운 북아메리카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지방을 저장하는 등의 혹은 길고 추운 북극의 겨울을 견디기 위해, 커다란 발은 눈밭에 빠지지 않기 위해 진화한 결과물이었지요. 하지만 북아메리카 지역에서는 기후 변화와 인간의 사냥으로 멸종했고, 유라시아 대륙으로 건너간 낙타들은 사막에서 의외의 ‘적성’을 찾아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등의 혹 덕분에 사막에서 오랫동안 먹고 마시지 않아도 버틸 수 있었고 커다란 발 덕분에 모래에 빠지지 않았던 거지요.

또 하나. 말의 원산지도 북아메리카 지역입니다. 하지만 말도 낙타와 마찬가지로 고향인 아메리카 대륙에서 9000년 전쯤 멸종했고, 유라시아 대륙으로 건너간 일부만이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북미 원주민’ 하면 말을 타고 달리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을 감안하면 아이러니한 일이지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북미 원주민은 수천년 동안 말이라는 동물의 존재를 잊은 채 살았습니다. 물론 이동도 걸어서 했고요. 훗날 북미 원주민들이 타고 다니는 말은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에서 ‘역수입’해온 것입니다. 15세기 말 유럽인들이 데려온 말들의 모습에, 북미 원주민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갔다고 합니다.
북미 원주민들은 말에 여러 마구와 장식을 달곤 했다. 요즘 차로 치면 튜닝이다. 특이하게 압사로가족은 요람(말의 몸통 앞부분)을 말에 묶어 아이를 태운 뒤 어디든 데리고 다녔다. 말하자면 '카시트'다.

유럽인의 상륙, 시작된 비극

다시 북미 원주민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북미 원주민들의 조상은 알래스카에서 시작해 캐나다로, 이어 지금의 미국 땅으로 내려가며 드넓은 대륙에 퍼졌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사는 환경에 맞춰 각자의 생활 방식과 문화를 만들며 오랜 세월 다양한 부족을 이뤘습니다.

다만 같은 시대 아시아나 유럽과 같은 정도의 중앙집권화된 문명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주로 거론되는 이유로는 쌀과 밀처럼 주식으로 삼을 식물이 부족했다는 점이 첫번째. 땅을 갈아 농사를 도울 만한, 소나 말처럼 덩치 크고 순한 동물(가축)이 부족했다는 점 등이 두번째로 꼽힙니다.

쉽게 말해 문명이 고도로 발전하려면 인구 밀도가 높아야 하고, 그러려면 많은 식량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만한 식량은 사냥이 아닌 농사를 통해서만 조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메리카 대륙은 농사에 불리한 조건이었다는 얘기지요.

여기에 더해 아메리카 대륙은 워낙 땅이 넓어서 굳이 복잡하게 모여 살 필요가 없기도 했습니다. 이는 유럽에서 온 사람들과의 싸움에서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면역력’이라는 측면에서요.
카이오와족의 잭 호키아가 1900년대 초 그린 '무제'. 대평원에 사는 카이오와족의 종교적 관습을 북미 원주민 화가가 직접 그린 작품이다. /국립중앙박물관
1492년 스페인의 지원을 받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북미 지역에 도착한 게 1492년. 그 후 북미 지역으로 이주하는 유럽인은 계속 늘어갔고, 이들과 원주민들의 갈등도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싸움도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싸움보다 북미 원주민을 훨씬 많이 쓰러트린 건 유럽인들이 가져온 전염병이었습니다.

유럽과 아시아 사람들은 오랜 옛날부터 가축 때문에 많은 병을 앓아야 했습니다. 예컨대 홍역, 결핵, 인플루엔자 등은 소나 돼지 사이에서 유행하던 전염병이 돌연변이로 인해 인간에게 옮는 병이 된 사례입니다. 게다가 유럽과 아시아 사람들은 한데 모여 도시를 이뤄 살며 서로 자주 교류했습니다. 그만큼 병은 널리 퍼졌고, 이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죽어갔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질병과 부대끼며 살아남은 사람들의 면역력은 강해졌습니다. 쉽게 말해 어느 정도의 병균이 들어와도 버틸 수 있게 됐습니다.

반면 북미 원주민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가축에게 병을 옮을 일도 잘 없었거니와, 병에 걸리더라도 인구 밀도가 낮아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이 희생됐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면역력은 유럽인에 비하면 무방비 상태. 이런 상황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물을 건너온 병균들이 들이닥치면서 북미 원주민들은 속절없이 쓰러졌습니다.

유럽에서 온 사람들은 그 틈을 타고 서쪽으로 서쪽으로 땅을 넓혀 갔습니다. 전염병에서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백인과 맞서 싸웠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진 뒤였습니다. 백인들은 사정없이 원주민들을 쫓아내고 죽였습니다. 그들이 한 말은 이랬습니다. “좋은 인디언은, 오직 죽은 인디언뿐이다.” 18~19세기 북미 원주민의 역사는 그래서 슬픔과 패배로 얼룩져 있습니다.
루이세뇨족의 프리츠 숄더가 1972년 그린 '운디드니:아메리카 대학살'. 1890년 있었던 원주민 학살사건을 주제로 그린 작품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딘 콘월의 '골드러시 2'(1926). 금광을 찾아 서부로 오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이다. 하지만 서부에 살던 원주민들은 강제 이주됐고, 이주민들에게서 옮은 질병에 시달렸다. 사냥꾼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군중이 곧 그림 왼쪽의 원주민들을 집어삼킬 듯 하다. /국립중앙박물관
미국 내에서 북미 원주민의 위상이 조금이나마 회복되기 시작한 건 제1차 세계대전 때가 돼서였습니다. 20세기 초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때 북미 원주민 1만2000명이 미군에 입대해 용맹하게 싸운 게 계기였습니다. 미국인으로서의 의무를 먼저 다할 테니, 권리를 달라는 의도였지요. 피 맺힌 이런 노력 끝에 1924년 미국 의회는 북미 원주민들의 시민권을 인정합니다. 같은 이유로 북미 원주민 4만4000여명이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미군에 지원해 싸웠습니다.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적잖은 북미 원주민들이 6·25전쟁에도 참전했습니다. 1만여명이 한반도에 왔고, 최전선에서 용맹하게 싸워 194명이 전사하는 가운데 의회 명예훈장 8명, 은성무공훈장 10명 등 많은 이들이 표창을 받았습니다.

북미 원주민과 만나는 우리

전시가 열리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는 북미 원주민의 역사·문화를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 관련 그림이 여럿 나와 있습니다.
호피족이 1900년대 초 만든 이 귀여운 조형물은 '축복과 생명의 물을 쏟아 붓는 여인'이란 의미의 '하하이우티'라는 수호신이다. 만물에 생명을 주는 물을 상징한다. /국립중앙박물관
나바호족이 1890년경 만든 지그재그 모양의 덮개. 바라보면 눈이 어질어질한 이 화려한 무늬를 '아이대즐러'라 하는데, 나바호족의 아이대즐러 무늬 덮개는 당시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온 화가들이 그린 북미 원주민의 초상화나 풍경화도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더욱 눈길을 끄는 건 북미 원주민들과 그들의 후손이 그린 작품들입니다. 빼앗긴 땅, 사라져가는 삶의 방식, 전쟁과 학살로 얼룩진 역사, 그래도 지울 수 없는 조상 대대로의 혼과 미감이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관람객 입장에서는 북미 원주민이라는 주제가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역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유럽 역사처럼 세계사 시간에 깊이 배웠거나 다양한 매체에 자주 등장해서 친숙한 것도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전시장을 둘러보다 보니 낯선 감정은 점차 희미해지고,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에게도 각자의 얼굴과 목소리가 있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생소하다는 걸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만큼 이번 전시는 ‘나와 다른 존재’를 아는 즐거움을 한껏 누릴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내가 모르던 것들을 새롭게 알게 되고, 나와 다른 존재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그건 우리가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는 목적이자 이유이기도 하니까요. 기사 첫머리에 언급한 사례처럼 무식한 실수를 저지를 일이 없어지는 건 덤입니다. 전시는 10월 9일까지 열린 뒤 부산시립박물관으로 장소를 옮깁니다.
루이세뇨족 프리츠 숄더가 그린 '인디언의 힘'(1972). 1970년대 널리 복제된 이 그림은 미국 원주민의 권리를 외치는 시각적 상징물이 되었다.
이번 주말 독자 여러분께 보내는 인사는 국립중앙박물관 도록 서두에 실린 <아파치족의 기도>로 대신하겠습니다.
날이 밝으면 태양이 당신에게
새로운 힘을 주기를

밤이 되면 달이 당신을
부드럽게 회복시켜 주기를

비가 당신의 근심 걱정을
모두 씻어 주기를

산들바람이 당신의 몸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를

당신이 이 세상을
사뿐사뿐 걸어갈 수 있기를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내내
그 아름다움을 깨닫게 되기를
**기사의 주요 내용 대부분은 국립중앙박물관 공식 전시 도록인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 지난 19일 진행된 크리스토프 하인리히 덴버미술관 관장 및 다코타 호스카 덴버미술관 부큐레이터와의 인터뷰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동물들의 이동과 관련된 내용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게재된 논문 Mid-Pliocene warm-period deposits in the High Arctic yield insight into camel evolution(Natalia Rybczynski, John C. Gosse, C. Richard Harington, Roy A. Wogelius, Alan J. Hidy & Mike Buckley), 북미 원주민 쇠퇴의 역사와 관련된 내용은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디 브라운 지음, 최준석 옮김, 나무심는사람 펴냄), 유전학적 계보는 믹스처(데이비드 라이크 지음, 김명주 옮김, 동녘사이언스 펴냄) 등을 참조했습니다. 그래픽과 사진 자료 등은 이진민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과 김혁중 학예연구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5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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