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가 낳은 기형적 부동산PF…리츠, 시행주체로 육성해야"

KDI FOCUS : 갈라파고스적 부동산PF, 근본적 구조개선 필요
사진=한경DB
한국의 고질적인 부동산 PF 위기 1997년 외환위기에서 시작됐고, 이를 해결하려면 시행사의 자기자본을 늘리도록 직간접적으로 규제하면서 리츠(부동산투자회사)를 시행 주체로 육성해야 한다는 국책 연구기관의 보고서가 나왔다.

20일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이 같은 내용이 담긴 ‘KDI FOCUS : 갈라파고스 적 부동산 PF, 근본적 구조개선 필요’를 발표했다.

저축은행·레고랜드·태영건설...십수년째 반복되는 'PF위기'

부동산 PF는 특정 부동산을 개발해 ‘미래에 얻을 이익’을 담보로 금융기관에서 자금을 조달해 아파트나 오피스텔 같은 부동산 사업을 시행하는 금융기법이다. 현재의 신용이나 담보로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리는 일반적인 자금조달 방식과 차이가 있다.

보고서는 부동산 PF가 한국 경제의 중대한 위험요인이라고 지적했다. 2019년 100조원 미만이었던 PF 익스포저(대출+보증)는 4년 만에 160조원 수준으로 급증했다. 토지 담보대출과 새마을금고 대출 등 합하면 230조원 규모에 달한다.

규모가 막대하다 보니 부동산 PF가 한번 휘청이면 금융경제는 물론 실물경제까지 무너지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2011년엔 30여개 저축은행이 뱅크런으로 무너지는 ‘저축은행 위기’로 10만명이 넘는 고객들이 손실을 입었다. 2013년에도 PF 익스포저가 비은행권에서 급증하면서 위기에 내몰렸고, 2019년엔 증권사가 PF 사업에 제공한 대규모 채무보증이 문제 되기도 했다. 2022년엔 레고랜드 사태가 터졌고 지난해 말엔 태영건설이 워크아웃을 신청하면서 20개 이상 종합건설사가 파산하는 일이 벌어졌다. 부동산 PF 위기가 금융시스템을 넘어 건설업 등 실물경제까지 덮칠 때마다 정부가 PF 보증을 확대하고 긴급 유동성을 지원하는 등 단기 처방을 내놓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KDI는 부동산 PF의 근본적 문제점으로 낮은 자기자본과 높은 보증의존도를 지목했다. 사업 주체인 시행사는 총사업비의 3%만 투입하고 나머지 97%는 빚을 낸다는 것이다. 보고서를 작성한 황순주 KDI 연구위원에 따르면 2021~2023년 추진된 총액 100조원 규모의 PF 사업장 300여개 채무구조를 분석한 결과 개별사업장에 필요한 총사업비는 평균 3749억원이었지만 시행사는 자기자본 118억원(3.2%)만 투입했다. 나머지는 ‘빌린 돈’인 셈이다.

부동산 PF 사업은 성공 여부가 불확실한데다 사업 주체가 투입하는 자기자본도 적기 때문에 금융회사도 선뜻 PF대출을 내주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은 시행사로부터 공사계약을 수주한 건설사가 PF 대출의 상환을 사실상 보증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건물을 준공한다는 내용의 ‘책임준공 확약’이라는 약정을 맺고 있다. 시행사가 공사비를 제때 지급하지 않아도 건설사는 자체 자금을 투입해서 준공을 해내야 하는 구조다.

이 같은 한국의 부동산 PF 시스템은 ‘갈라파고스’ 적이라는 것이 KDI의 지적이다. 한국과 달리 주요 선진국에선 부동산 PF 사업의 자기자본비율이 30~40% 수준이다. 한국은 인허가에 실패하거나 사업성 의문 제기되면 본 PF 차환이 이뤄지지 않아 부실이 발생하지만, 주요국에선 자기자본으로 토지비를 충당해 차환리스크가 없다. 해외 주요국에선 시행사가 아닌 제삼자가 지급보증을 제공하는 경우도 찾기 어렵다.

외환위기에서 시작된 부동산 PF...시행사 자기자본 규제해야

황 연구위원은 한국이 이처럼 기형적인 부동산 PF 시스템을 갖게 된 이유를 1997년 외환위기에서 찾았다.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900% 수준이던 건설사 부채비율을 200% 이하로 낮추라고 요구하자, 건설사가 개발사업을 직접 시행해 자기 이름으로 대규모 부채를 부담할 수 없게 된 것이 부동산 PF를 도입하게 된 주요 원인이라는 설명이다. 당시 시행사는 영세한데다 지분투자자도 없었던 반면 건설사 규모는 상대적으로 컸기 때문에, 시행사가 대출받고 건설사가 보증하는 기형적인 부동산 PF 구조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선분양 관련 제도는 저자본·고보증 구조를 더욱 강화했다는 분석이다. KDI는 “한국은 아파트 같은 30세대 이상 공동주택을 선분양할 때 수분양자가 낸 계약금과 중도금을 공사비로 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나라”라고 지적했다. 공사비를 수분양자 자금으로 충당할 경우 토지비만 조달하면 되기 때문에 총사업비 중 금융회사에서 대출받아야 할 돈이 크게 줄고, 자본을 적게 투입해도 사업을 시행할 수 있는 구조가 완성된다는 설명이다.

황 연구위원은 이 같은 부동산 PF 문제를 근본적으로 고치려면 건설사 등의 제삼자 보증을 폐지하고, 시행사가 PF대출을 받을 때 일정 수준의 최소자기자본비율을 요구하는 ‘직접규제’를 도입하거나 자본 비율이 낮을수록 더 많은 대손충당금을 쌓도록 하는 ‘간접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황 연구위원은 “제삼자에게서 보증받을지 자기자본을 적게 투입할지와 같은 자본구조는 기업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맞지만, ‘묻지마 투자’나 시스템 리스크 확대 등 부정적인 외부효과가 존재하기 때문에 제도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했다.황 연구위원은 구체적인 규제 방식으로 미국처럼 총사업 가치(총사업비+개발이익) 대비 최소 15%의 자기자본을 투입하지 않으면 해당 사업에 대한 대출을 ‘고위험 상업용 부동산’ 대출로 분류하는 방안을 예로 들었다. 이 경우 은행은 일반 기업 대출에 비해 대손충당금이나 은행자본을 50% 이상 더 쌓아야 한다.

황 연구위원은 “이 같은 규제가 시작되면 주택공급이 위축될 것이란 우려가 있지만, 개발이익은 소규모 시행사가 독점하면서 위험은 사회화시키는 구조를 유지해선 안 된다”며 “자기자본을 늘리고 보증의존도를 낮추면 주택공급 비용이 절감되는 측면도 있다”고 했다.

황 연구위원은 리츠를 직접적인 시행 주체로 육성하는 게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리츠는 출자 제한 규제가 없고, 자본력이 높다는 점이 특징이다. 리츠는 개발사업을 시행해본 경험과 전문성이 있어서다. 리츠는 주식의 30% 이상을 일반의 청약에 제공해야 하는 등 막대한 개발이익을 사회화하고, 관련 법에 따라 최소 자기자본비율 규제가 적용되고 있기도 하다.


이광식 기자 bumer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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