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님이시여, 저의 왕자님은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arte] 강성곤의 아리아 아모레

드보르자크 오페라 中 ‘달의 노래’
2020년 독일 영화 <운디네(Undine)>. 운디네는 독일을 비롯한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물의 요정을 말한다. 영어로는 온딘(Ondine). 인어공주 이야기와 매우 유사하다. 인간과 영원한 사랑을 이루면 인간이 될 수 있지만 상대가 배신하면 그를 죽이고 물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
영화 &lt;운디네&gt; 스틸컷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는 이걸 현대적으로 해석하되, 신비로운 체험을 암시와 복선으로 잔잔히 깔아 놓는다. 운디네와 요하네스, 그리고 크리스토프. 삼각관계의 세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랑을 마주할까.

베를린 탄생 역사에 관한 설명이 운디네의 입으로 통해 나온다. “베를린은 사실 물의 땅이었어요. 어딜 가나 축축했죠. 여기 처음 정착한 사람들은 슬라브인이었답니다. 베를린은 슬라브 말로 '습지의 땅'이라는 뜻이에요.”
영화 &lt;운디네&gt; 포스터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물의 정령인 운디네. 같은 이름의 여주인공. 그녀가 하는 일은 과거 물 머금은 젖은 땅이었던 베를린의 시청 도시문화해설사. 게다가 연인의 직업은 산업 잠수사(潛水士), 이런 연결인 셈이다. 독일 최고의 영화감독으로 인정받는 크리스티안 페촐트(1960~ )가 메가폰을, 파울라 베어(1995~ )와 프란츠 로고스키(1986~ )가 주연을 맡았다. 두 사람 모두 자타공인 일류 배우. 영화를 놓친 분들은 OTT 감상 강추다.위에서 슬라브(Slave)라 했던가? 슬라브하면 클래식 쪽에선 주저 없이 드보르자크(Antonín Dvořák, 1841~1904, 체코)다. 무려 16개의 슬라브 무곡을 토해낸 이가 바로 안토닌 드보르자크. 그의 대표 오페라가 <루살카(Rusalka)>. 물의 요정을 가리키는 체코어이며 60세 때 만년의 작품이다. 여기서 기막히게 아름다운 아리아가 나오는데 ‘달의 노래’ 혹은 ‘달에게 바치는 노래’, ‘Song to the Moon’이다.

“달님이시여, 저의 왕자님은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그를 가슴 속 깊이 사랑한다는 걸 전해주세요. 제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는 걸 말해주세요. 그가 깨어있는 모든 순간 나를 꿈꾸게 해주세요. 오, 달님이시여 사라지지 마세요.”
오페라 &lt;루살카&gt; 포스터
루살카가 숲속에서 스치듯 만난 인간계의 왕자님을 향해 부르는 애절한 노래. 보헤미아 특유의 서정적 선율이 우리 정서와도 맞닿아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명곡이다.최고의 명연은 역시 체코 소프라노 루치아 포프(Lucia Popp, 1939~1993, 체코)일 터. 클래식에서 본고장⸱장소성(場所性)을 무시할 순 없다. 브라티슬라바 출신이라 국적이 슬로바키아라고 할 수도 있으나 그녀가 태어날 때는 엄연히 체코공화국이었다. 사실 가계(家系)를 깐깐히 따지면 슬라브⸱모라비아⸱독일⸱루마니아가 섞여 있다. 다양성은 역시 힘이 세다!
[위] 루치아 포프 / 출처. 독일 위키피디아 [아래] 아리아 '달의 노래'가 수록된 포프의 음반 / 출처. Bugs
[루치아 포프 - '달의 노래' 스위스 취리히 오페라 극장 갈라콘서트 실황 버전 (1984)]


24세 때 모차르트 ‘밤의 여왕의 아리아’를 눈부시게 소화해 센세이션을 일으킨 이래 딴딴하고 기품있는 연주로 루치아 포프라는 멋진 이름을 각인시켰다. 긴 호흡을 바탕으로 풍성한 저음과 극고음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내공의 소프라노다. 원래 배우 출신이라 금발에 푸른 눈으로 매혹이 배가된 면도 없지 않다. 그녀는 세 번 결혼했는데 첫째는 독일인 지휘자, 둘째는 영국 출신 음악감독, 셋째는 15살 연하 독일 테너였다. 54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몹쓸 뇌종양이 그녀의 육신을 삼켰다. 포프가 가장 사랑한 도시는 뮌헨. 거기서 죽었고, 그래서 그녀 이름을 딴 우회로가 남아있다. 루치아 포프 보겐(Lucia-Popp-Bogen).
독일 뮌헨의 루치아-포프-우회로 (By Kritzolina) / 이미지 출처. 독일 위키피디아
‘달의 노래’는 멜로디가 풍기는 분위기가 유려해 관현악 버전으로도 자주 쓰이고, 영화의 OST에서도 인기가 높다. 그 중 특히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Driving Miss Daisy)>(1989)란 작품에서 근사하게 어울렸다. 깍쟁이 유대인 할머니와 흑인 운전사의 우정과 인간애를 그린 브루스 베레스포드의 이 영화는 오스카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비롯해 4개 부문을 휩쓴다. 제시카 탠디와 모건 프리먼 주연. 꽃향기 그윽한 정원에서 FM라디오를 평화로이 듣는 데이지 여사. 거기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바로 이 곡 ‘달의 노래’다. 슈테판 솔테즈가 지휘하는 뮌헨방송교향악단이 협연한 버전(1988) [관련 영상 보기]. 체코어로 멋들어지게 노래하는 루치아 포프. 드보르자크가 만약 살아있었다면 “그래, 바로 이거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강성곤 음악 칼럼니스트·전 KBS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