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전복적이고 모던한 엘비스 프레슬리 영화 '프리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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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엘비스 프레슬리의 수많은 사진들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인물은 역시 그의 아내, 프리실라 프레슬리였다. 두꺼운 아이라인과 얼굴 크기의 두 배쯤 되는 거대한 헤어 스타일로 기억되는 그녀는 엘비스의 뮤즈이자 그림자였다. 프리실라는 자서전, ‘엘비스와 나 (Elvis and Me)'를 통해 그녀가 기억하는 엘비스와 그와 보냈던 인생의 한 조각을 공유한다. 소피아 코폴라의 신작 <프리실라>는 프리실라의 책을 바탕으로 매체와 타블로이드 밖의 그녀, 즉 뮤즈가 아닌 엘비스의 그림자로서의 프리실라의 삶을 조명하는 영화다.영화는 14살의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소녀 ‘프리실라 볼리외 (케일리 스패니)’와 함께 시작된다. 그녀는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독일로 이사 왔지만, 친구도, 흥미로운 일도 없는 이 나라에서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어느 날, 동네의 한 식당에서 알게 된 한 미군 친구를 통해 미군 기지의 파티에 참석한 프리실라는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 ‘엘비스 프레슬리 (제이콥 엘로디)’와 마주하게 된다.당시 스물네 살이었던 엘비스는 무려 열 살이나 어린 소녀 ‘프리실라’에게 첫눈에 반하고, 두 사람은 거침없이 서로에게 빠져든다. 평범한 소녀였던 프리실라는 엘비스의 연인으로 새로 탄생한다. 새로 탄생한다는 표현은 사실상 중의적인 표현이다. 지극히 보수적이고 지루한 집안에서 숨죽이고 살아가던 프리실라는 엘비스의 부와 명예를 모두 공유하는 신데렐라가 되지만 동시에 그를 위해서 모든 정체성과 욕망을 희생해야 하는 그림자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얼핏 보면 영화는 세기의 사랑을 로맨틱하게 극화한 멜로 영화 같지만 소피아 코폴라의 <프리실라>는 엘비스와 프리실라의 로맨스 보다는 프리실라의 일상, 그리고 그녀가 마주해야 했던 현실에 더 무게를 두는, 프리실라를 주제로 한 ‘에세이 영화’ 같은 느낌을 주는 극영화다. 이는 지금껏 존재해왔던 수많은 ‘엘비스 영화들’과 철저히 다른 노선이기도 하다. 앞서 만들어진 영화들은 주로 엘비스의 천재적인 음악성을 조명하거나 (<엘비스> (바즈 루어만, 2022), <더 킹> (유진 자렉키, 2017)), 혹은 그의 신화적 존재를 판타지화 한 코미디 영화 (<엘비스와 닉슨> (리자 존슨, 2016), <하트브레이크 호텔> (크리스 콜럼버스, 1988))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프리실라의 시선으로 본 엘비스
뮤즈 아닌 그림자로서의 삶 그려
'엘비스 영화의 새로운 패러다임' 평가
엘비스가 아닌 프리실라가 영화의 주체가 되는 만큼 <프리실라>는 그녀의 캐릭터화에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가령, 대중이 기억하는 지나치게 부풀린 머리와 진한 메이크업의 프리실라와는 반대로 그녀는 매우 소극적이고 조용하며 수동적인 인물이다. 이러한 ‘작은 인물 (이 영화에서 프리실라는 엘비스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여자로 등장한다)’로 프리실라가 보여지는 데 있어 그녀를 연기하는 케일리 스패니의 역할이 크다.사실 이 배우는 프리실라 프레슬리보다 훨씬 더 아담하고, 실제 인물과는 상이한 외모와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코폴라는 엘비스로 인해 늘 마진으로 존재하거나 소품처럼 보여져야 했던 프리실라를 표현하는 데 있어 실제로도 몸이 작은 배우를 원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서 케일리 스패니는 감독 소피아 코폴라가 해석한 프리실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아이콘이기도 하다.
영화 속 프리실라는 예쁘진 않지만 총명함이 눈에 가득한 소녀다. 그럼에도 그녀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순종적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늘 타인의 눈치를 보거나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한다. 엘비스를 만나고 나서부터 활기를 띠는 듯하지만, 옷에서부터 화장, 머리 색깔까지 강요하는 엘비스의 횡포가 커지면서 그녀는 다시금 ‘작은 존재’로 돌아간다.실제로 당시 미디어를 범람했던 엘비스의 결혼 이벤트와는 다르게 영화 속에서 결혼식은 아름답거나 비중 있게 그려지지 않는다. 이미 엘비스의 노예로 살고 있던 프리실라에게 ‘결혼’은 (당시에는 기뻤겠지만) 추락의 시작점이자 그녀가 감내해야 할 뼈 아픈 교훈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이후로 지속되는 엘비스의 외도, 마약 중독, 그리고 프리실라를 향한 폭력과 학대는 이 작은 소녀의 육신을 더 작거나, 미미하게 축소시킨다.영화는 마치 <델마와 루이스>처럼 긴 암흑의 터널 끝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혼자 운전을 하며 어디론가 달리는 프리실라를 비추며 끝이 난다. 다소 예상치 못했던 엔딩의 시점이긴 하지만 이는 분명 소피아 코폴라가 해석하는 (남성 셀러브리티의 파트너로서의) 프리실라의 삶, 그리고 나아가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한 명확한 표식이다.
흥미로운 것은 엄연한 ‘엘비스 영화’의 범주에 들어갈 작품이면서도 <프리실라>에는 엘비스의 노래들보다 다른 아티스트의 주옥같은 음악들이 더 힘 있게 등장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영화 속에서 몇 차례 등장하는 돌리 파튼의 “I will always love you”는 그럼에도 프리실라가 사랑했고, 그리워했던 단 한 명의 남자, 엘비스와의 시간들을 복합적이고도 감성적으로 전달하는 매개이다.
분명 <프리실라>는 앞으로 탄생할 엘비스의 기록물들까지 포함하여 가장 전복적이고도 모던한 ‘엘비스 영화’로 남지 않을까 생각된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