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 폭주에 행복한 비명…"죄송합니다" 사과까지 한 이 회사

AI 반도체 시대 ‘슈퍼을’…글로벌 패키징 장비 ‘3대장’
반도체의 원판인 웨이퍼. 뉴스1
일본의 반도체 패키징(여러 칩을 묶어 한 칩처럼 작동하게 하는 공정) 장비업체인 디스코의 세키야 카즈마 최고경영자(CEO)는 올해 들어 출장이 잦다. 예년에 비해 고객사의 ‘SOS’가 많아져서다.

평소 같았으면 새 장비 세일즈가 출장의 목적이었겠지만 올해는 양상이 달라졌다. 고객사 경영진을 만나 “원하는 만큼 장비를 납품하지 못해 죄송하다”며 양해를 구하기 위한 목적이 대부분이다. 최근 패키징 수요가 커지면서 디스코에 장비 주문이 몰리는데, 생산 능력의 한계 때문에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반도체업계에선 “인공지능(AI) 반도체 품귀 현상의 원인이 디스코 장비 탓”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장비 빨리 달라" 줄 서는 고객사

최근 글로벌 반도체 장비업계에서 패키징 전문 장비사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일본의 디스코, 네덜란드의 베시(BESI), 한국의 한미반도체 등이 주인공이다.

1나노미터(nm·1nm=10억분의 1m) 이하 초미세 공정 기술 개발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여러 칩을 잘 묶어 성능을 극대화하는 패키징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최근 각광 받는 HBM(고대역폭메모리), 엔비디아 ‘H100’ 같은 AI 가속기도 패키징을 거쳐 성능이 극대화된 반도체다. 패키징 장비 업체 관계자는 “선금을 줄테니 생산 라인을 깔고 장비를 충분히 만들어달라는 고객사도 있다”고 말했다.

시장의 관심은 주가 상승률 등의 지표에서 확인된다. 디스코의 연초 이후 지난 21일까지 주가 상승률은 89%로 같은 기간 일본 간판 장비업체 TEL(45.5%)을 압도한다. 한미반도체는 시총이 17조4880억원에 달한다. 연초 이후 주가 상승률은 196.6%다.

TC 본더, 하이브리드 본딩 등 전문분야에서 강점

디스코, 베시, 한미반도체 등이 주목 받는 건 패키징 중에서도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오랜 기간 갈고닦은 기술력 덕분이다. 1937년 설립된 디스코는 웨이퍼를 얇게 깎는 ‘그라인더’, 웨이퍼의 칩을 자르는 ‘쏘우’ 관련 장비에서 절대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계 시장 점유율은 70% 수준이다. 실적도 꾸준히 증가세다. 지난해 1분기 매출은 9086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1.9% 늘었다.

베시는 ASML의 뒤를 이을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산업의 희망으로도 불린다. 전문 분야는 ‘다이 어태치’ 장비다. 칩을 기판에 붙일 때 쓰이는데 최근엔 칩과 칩을 직접 연결하는 ‘하이브리드 본딩’에도 활용된다. 지난해 베시의 다이 어태치 장비 시장 점유율은 40%로 세계 1위다.

한미반도체는 HBM 제작에 필수적인 열압착(TC) 본더 장비 시장의 강자다. D램 칩을 쌓을 때 열과 압력을 가해 칩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게 하는 역할을 한다.

커지는 패키징 장비 시장

패키징 장비 전문업체가 계속 커질 것이란 긍정론이 우세하다. 시장조사업체 테크인사이츠에 따르면 글로벌 패키징 장비 시장은 지난해 410억달러(약 57조원)에서 2028년 610억달러(약 85조원)로 커질 전망이다. 이 기간 성장률은 48.7%로 일반 장비(전공정) 시장의 성장률(35.8%, 950억달러→1290억달러)보다 크다.

사업 영역도 확장되고 있다. SK하이닉스에 주로 납품했던 한미반도체는 지난 4월 마이크론에 226억원 규모 TC 본더를 납품하는 데 성공했다. 시장에선 삼성전자와의 거래도 시작될 것이란 관측이 꾸준히 나온다.

베시는 내년 양산 예정인 HBM4에 적용될 예정인 ‘하이브리드 본딩’ 장비와 관련해 ‘가장 앞서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현재 칩과 칩을 연결할 때 둥근 ‘숄더블’이 필요하다. 하이브리드 본딩은 숄더블 없이 직접 연결해, 배선을 줄이고 데이터 이동 속도를 높일 수 있다. 베시는 지난 5월 한 대형 고객사에 26대의 하이브리드 본딩 장비를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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