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가는 반도화랑 경리 아가씨에게 박수근이 준 그림의 행방

[arte] 한이수의 길 위의 미술관

⑤ 양구의 박수근미술관을 가다
강원 양구군의 박수근미술관을 가기 위해 차를 몰았다. 서울-춘천 간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교통이 수월했지만 수많은 터널을 지나야 했다. 먼저 춘천을 들러 한 번 쉬어갔다. 춘천을 들른 김에 '김유정문학촌'을 찾았다. 김유정은 1908년생, 박수근은 1914년생이다. 한 사람은 소설가, 한 사람은 화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예술적 경향은 공통점이 많다. 우리나라의 서정을 예술 작품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혹자는 김유정의 문학 속 인물을 만나고 싶으면 박수근의 그림을 보면 되고, 박수근의 그림을 깊이 알고 싶으면 김유정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면 된다고 한다.

박수근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노인이며, 여인이며, 아이들은 김유정 문학 속에서 봉필 영감, 점순이, 데릴사위, 뭉태 등과 닮았다. 김유정의 대표 소설이 <봄봄>이고, 박수근의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작이 <봄이 오다>이다. 둘 다 봄을 주제로 삼아 작품을 완성했다. 그들이 봄을 그토록 희구한 것은 삶이 고달팠기 때문이다. 김유정이 춘천에서 서울로 올라갈 때, 박수근은 양구에서 춘천으로 돌아다녔다. 아버지의 광산 사업 실패로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다가, 어머니가 유방암에 걸려 타계하자 춘천에서 미술 공부를 하기도 했다. 양구, '10년이 젊어지는 곳'이라고 한다. 또 다른 수식어, '우리나라의 배꼽'이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양구는 동쪽으로 많이 치우친 곳이 아닌가.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동해 바다가 나오는데. 그런데 포천에 가도 '나라의 중심'이라고 한다. 그러면 충주는? 자세히 알아보니 포천은 우리나라 내륙만을 측정할 때 중심이고. 충주는 우리나라 남과 북 끝에서 걸어가게 했더니 만나는 곳이 충주라 해서 중심 고을이라는 것이다.

양구는 동쪽 끝 섬 독도, 남쪽 끝 마라도를 포함한 해양 면적까지의 영역 중심이다. 양구는 6·25 때 격전지였다. 교련 시간에 배운 펀치볼도 양구군 해안면에 있다. 해발 1100m 침식분지이다. 민통선 안의 대암산을 비롯한 높은 산들의 중앙 펀치볼(punch bowl) 격전지가 양구이다.
박수근 &lt;풍경 산&gt; (1950년대), 27 * 33.5 cm
양구 민통선에서 금강산까지는 30킬로밖에 안 된다. 전략상으로 무척 중요한 곳이지만 대단히 척박한 곳이다. 아무런 산업이 없는 곳. 그래서 1990년대 말, 고 임경순 양구 군수는 양구의 먹거리를 위해 고심하다가 회심의 카드를 발견했다. 박수근미술관. 양구가 낳은 국민화가가 박수근 아닌가.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 제11회 입선작. 아쉽게도 도록으로만 남아 있다. 박수근 생가의 모습이다.
양구의 박수근미술관은 주변이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지금도 주변에 인가가 별로 없는 곳인데 박수근이 살았을 때는 오죽했을까. 사명산을 따라 내려오다가 산의 줄기가 다한 곳에 박수근미술관이 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안내판과 안내판 옆의 나무이다. 눈에 익었다. 자세히 보니 소설 <나목>에 등장하는 <나무와 두 여인>의 나무와 닮았다.
[왼쪽] 박수근 &lt;나무와 두 여인&gt; (1962), 캔버스에 유채, 130 * 89 cm / 출처. 삼성리움미술관 [오른쪽] &lt;나무와 두 여인&gt;에 등장하는 나무와 닮았다.
미술관에 들어가기 전에 주변을 둘러본다. '박수근 좌상'이 보인다. 창신동에 살 때 대청에서 찍은 사진이다. 전농동 대청에서 찍은 사진도 있는데 '전농동 사진'은 양복을 입고 뿔테 안경을 쓰고 찍어 마치 대학교수 같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작고하기 전이라서 그런지 무언가 불안한 모습이다. 가만히 보면 눈의 초점도 맞지 않는다. 백내장 수술로 이미 실명했기 때문이다.창신동의 작업실로 쓰였던 마루에서 찍은 사진은 생기가 흐른다. 막내딸을 안고 있는 김복순 여사의 옆에서 반소매 내의에 양말을 신고 손가락 깍지 낀 채 정면을 바라보는 사진. 천연스러운 자세와 어진 눈빛, 인물과 주변이 일치하고, 새로 산 흰 고무신이 마루에 잘 모셔져 있다. 그래, 박수근은 대학교수보다는 서민의 모습이 참 잘 어울린다. 2002년 10월 25일 박수근미술관이 개관할 당시 명예 관장이었던 유홍준 교수는 전준 동상 작가에게 창신동 사진을 건넸다. 런닝 차림으로 대청에서 찍은 박수근의 모습이 더 서민적이라는 것이다.

좌상 앞에 개울이 흐른다. 빨래터이다. 왜 그는 빨래터를 그토록 좋아했을까? 아내 김복순 여사의 <박수근 아내의 일기>에 답이 나와 있다.


일전에 당신이 우리 어머니와 빨래하러 같이 가셨을 때 어머니 점심을 가져간다는 핑계로 빨래터에 가서 당신을 자세히 보고 아내로 맞아들이기로 마음으로 결정했습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고는 붓과 팔레트 하나밖에 없습니다. 육체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 김복순 <박수근 아내의 일기> (현실문화), 78쪽

김복순의 아버지는 상사병이 나 몸져누운 아들을 살려내라고 소리소리 지르는 박수근 아버지의 생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춘천의 좋은 혼처와 날까지 받아 놓았는데….그러나 결혼은 김복순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응답이었다. "하나님 아버지, 이다음에 커서 제가 시집을 갈 때에는 우리처럼 부잣집으로 시집 보내지 마시고, 하루 세끼를 조죽을 끓여 먹어도 좋으니 예수님 믿고 깨끗하게 사는 집으로 시집가게 해주세요." 금성의 바람쟁이로 소문난 아버지의 생활에 환멸을 느껴 이처럼 기도하고 그 응답으로 박수근을 남편으로 맞았다.

빨래터를 가려면 자작나무 숲을 지나야 한다. 2004년에 이곳에 온 전 리움미술관장 홍라희 여사가 빨래터 주변에 자작나무 숲을 조성하라고 기증한 것이다. 박수근 묘역으로 올라갔다. 그가 다녔던 창신동 동신교회 묘원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비석에는 '서민화가 박수근'이라고 쓰여 있다. 그를 상징하는 수식어가 '국민화가', '서민화가'이다. 박수근은 어느 말을 더 좋아할까?
박수근 묘. 2004년 포천에 있는 동신교회 공원 묘역에서 미술관으로 이장했다.
한자로 '서민화가 박수근 기념비'라 쓰여 있다.
달팽이처럼 말린 형태의 벽을 따라 난 진입로를 돌아야 한다. 울퉁불퉁한 화강암을 쌓아 만들어 화가의 마티에르를 생각나게 한다. 석탑이 보인다. 석탑의 질감을 이해하기 위해 경주 불국사에 자주 들렀다. 박수근미술관이 건립된 지 20여 년이 흘렀다. 총공사비는 단 22억 원, 설계비조차 주지 못할 형편에 이종호 건축가가 나섰다. 2002년 어렵사리 개관했지만 정작 미술관에 박수근의 진작은 없었다. 박수근 작품 기증에 선뜻 나선 사람이 현대갤러리 박명자 회장이다.
1966년 박명자 회장이 결혼할 때 김복순 여사가 남편의 약속을 지켜 결혼 선물로 준 &lt;굴비&gt;
가난한 밥상에 굴비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여 그린 굴비 그림. 반도화랑을 자주 들를 때 경리 아가씨가 우리나라 화랑의 대모가 된 박명자 회장이다. 앳된 처녀 박명자에게 박수근은 시집갈 때 그림을 한 점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결혼식 때 아내 김복순 여사가 준 그림이다. 미술관 개관 2년 후인 2004년, 박 회장이 이 그림을 미술관에 다시 기증했다. "마음속 깊이 쌓아 온 박수근 선생에 대한 감사의 빚이 풀리는 것 같다"고 술회했다. 아름다운 사랑의 순환이다. 진본 작품이 이렇게 하나둘씩 박수근미술관으로 돌아왔다. 아쉽게도 양구에 살 때 그린 그림은 별로 없다. 전쟁통에 많이 소실되었다. 그가 처음 입선했을 당시의 그림이 조선미술전람회 11회 도록에 사진으로만 존재한다.

1940년 2월 10일 금성감리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주례를 서준 분이 한사연 목사이다. 해방 후 한사연 목사의 권유로 민주당 대의원이 되었지만 이로 인해 6·25전쟁 때 지명수배되어 결국 남하하게 된다. 어쩌면 주례 목사님 덕에, 우리는 박수근이라는 국민화가를 얻게 된지도 모르겠다.
조선미술전람회 20회 입선작 &lt;맷돌질하는 여인&gt;은 아내 김복순 여사를 모델로 그렸다. 이 그림은 이후 여러 번 변주되어 전해 온다.

당신이 '성소'를 업고 뜨거운 햇볕 속에서 그냥 양산 없이 다니는 게 너무도 가슴이 아팠으나 양산을 살 돈은 없고 해서…. 이 양산은 어느 상점에서 훔쳐 온 것이라오, 그 뜨거운 사랑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한없이 뜨거운 사랑.

-김복순 <박수근 아내의 일기> (현실문화), 114쪽

가난해서 양산 살 돈이 없어 일본인 상점에서 양산을 훔쳐 온 박수근의 사랑 앞에 가슴이 저려 온다. 그의 작품을 보고 감동하는 것은 사람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사랑 때문이다.

1961년 일본 국제자유미술전에 출품한 작품이 도둑맞았을 때, 아내는 일본 경찰에 신고해서 잡으려 했으나 박수근이 만류했다. '그림 가져간 사람이 돈은 없고 작품은 탐이 나고 해서 가져갔으니 도난당한 것은 영광'이라고 오히려 기뻐했다. 이런 따뜻한 심성이 감동적인 작품을 남긴 것은 아닐까?

독실한 크리스찬인 그의 건강이 나빠진 것은 아니러니하게도 잦은 음주였다. 아내의 만류에도 "나는 술까지 마시지 않으면 미치겠어. 그래서 마신다"며 술을 끊지 않았다. 그가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의 미술계 현실에 대한 좌절이었다. 보통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해 실력만으로는 오를 수 없는 미술계의 장벽,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창신동 집 앞이 도로로 수용되고, 집에 소송이 붙어 패한 뒤 음주가 잦아졌다.

결국 왼쪽 눈이 뿌옇게 잘 보이지 않고 흰 막이 점점 눈동자를 가로막은 백내장이 생겨, 걱정할까 봐 아내에게 얘기도 안 하고 신예용안과에서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고통이 심해 최창수안과에서 아픈 눈의 신경을 끊었고 결국 실명이 되었다.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실명은 치명적이다. 뒤늦게 세브란스에 갔지만 이미 신장과 간이 망가진 뒤였다. 51세의 아까운 나이에 "천국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너무 멀어"하며 눈을 감았다.

양구에 있는 그의 생가에는 너무도 멋진 미술관이 생겼다. 창신동에 그가 살았던 집도 아직은 흔적은 남아 있다 (관련 칼럼 읽기). 현재 음식점으로 변했지만 작게나마 박수근을 기리는 공간으로 활용하면 어떨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박수근을 국민화가라고 부른다면 창신동에 그를 기리는 공간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집터에 있는 음식점을 매입할 수 없다면 전세라도 얻어 박수근 기념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박수근의 아들 박성남 화가가 창신동 집에 찾아가 그 집 담벼락이 그때와 똑같이 남아 있다고 놀라워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얼마 전에 그는 박수근이 개인전을 한 용산 미군 부대 앞에 작은 표석이라도 놓자고 신문사에 제안한 적도 있다. 박수근을 위한 흔적이 서울 이곳저곳에 세워지기를 바란다. 국민화가라고 떠들지만 말고 양구군이 적은 예산으로 박수근미술관을 만들어 명소가 된 것처럼, 서울시가 무엇이라도 해 주기를 기대하며 '길 위의 미술관 박수근 편'을 마친다. /한이수 칼럼니스트

* 다음 편 [길 위의 미술관]은 언어학과 미술사를 전공한 최은규 박사의 '나혜석 편'이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