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틱 시네마의 명장, 애드리안 라인의 <나인 하프 위크>

[arte] 김효정의 금지된 영화 욕망의 기록

영화
냉장고 앞에 쪼그리고 앉은 두 남녀는 냉장고 안의 음식을 서로에게 던지고 묻히며 장난을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 놀이 같은 이 장난은 곧 ‘성인용 유희’로 둔갑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젤리와 휩 크림을 먹이기 시작하고 여자는 곰이 벌통을 파먹듯 게걸스럽고 야생적으로 남자의 음식을 받아먹는다. 곧 여자의 하얀 티셔츠가 빨간색 젤리와 하얀 휩 크림으로 범벅이 된다.

서술한 ‘냉장고 장면’은 1978년 동명의 제목으로 출판된 엘리자베스 맥닐 (본명: 잉게보르그 데이)의 회고록을 영화로 만든 <나인 하프 위크>를 대표하는 장면이자, 80년대의 할리우드 영화를 통틀어 가장 화제가 되었던 장면이기도 하다. <나인 하프 위크>는 애드리안 라인 감독의 세 번째 장편 영화로, 논란이 된 몇몇 정사씬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제작비의 10배에 달하는 (총) 흥행성적을 거두며 라인을 할리우드의 주류 감독 중 하나로 등극시켰다.
영화 &lt;나인 하프 위크&gt; 포스터 / 이미지 출처. 다음영화
몇 가지 문제적인 설정을 제외한다면 영화는 ‘에로틱 로맨스’로 분류할만한 멜로 드라마다. 이야기는 젊고 낭만적인 이혼녀 ‘엘리자베스 (킴 베이싱어)’의 시점으로 시작된다. 그녀는 화랑에서 근무하던 어느 날 부유한 주식 중개인 ‘존 (미키 루크)’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녀만큼이나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그를 만난 순간부터 엘리자베스는 마치 최면에 걸린 듯 그에게 빠져든다.

그러나 그는 엘리자베스에게 눈을 가린 채 애정 행위를 하게 하고 기묘한 방법으로 그녀를 성의 노예로 전락시키려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존은 수위가 높은 성적인 요구를 엘리자베스에게 강요하고,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그의 가학적인 요구에 자신이 길들여져 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요구가 한계를 넘어서고,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돌이켜 확인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려 하지만 존은 사랑을 마치 섹스 게임의 일부분 정도로만 여긴다. 엘리자베스는 존에 대한 회의와 실망을 느끼고는 50을 세기 전에 돌아오라는 그를 뒤로하고 왜곡된 사랑의 게임에서 벗어나 수많은 인파 속으로 걸어 나간다.
영화 &lt;나인 하프 위크&gt; 스틸컷 / 이미지 출처. 다음영화
영화는 1984년에 완성되었지만 높은 성적 수위와 SM 설정으로 1986년까지 개봉되지 못했다. 결국 미국 버전은 엄청난 편집을 거쳐 개봉을 할 수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미국 시장에서는 흥행에 참패했다. 그럼에도 (삭제되지 않은 버전의) 영화는 영국과 프랑스, 캐나다 등에서 대히트를 기록했고 이러한 흥행이 다시 북미 시장에서 화제가 되는 역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영화 &lt;나인 하프 위크&gt; 스틸컷 / 이미지 출처. 다음영화
영화의 감독 애드리안 라인은 <나인 하프 위크>의 성공 이후로 <위험한 정사>, <롤리타> 등 이른바 에로틱 시네마의 명장으로 떠올랐다. 전작 <플래시 댄스>에서부터 보여지는 그의 경향은 지독하게도 탐미주의적인 육체의 묘사와 음악의 사용이다. <플래시 댄스>에서 땀에 젖은 제니퍼 빌즈가 “What a feeling”에 맞춰 체육관을 누비며 춤을 추는 씬이 영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면 <나인 하프 위크>의 그것은 킴 베이싱어의 스트립 댄스 씬이다.

존을 위한 선물로 엘리자베스는 팝콘을 먹으며 소파에 앉아 있는 그의 앞에 선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창문의 블라인드 너머로 그림자로만 보여진다. 턴테이블 위에 놓인 조 카커의 레코드가 돌아가면서 “You Can Leave Your Hat On”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곧 존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엘리자베스의 그림자는 춤을 추기 시작한다. 창문 너머에 있던 그림자는 창문 앞으로 나와 형체가 되고, 그 형체는 리듬에 맞춰 옷을 하나씩 벗어 던진다. 엘리자베스의 관능적인 움직임은 카메라의 다양한 각도를 통해, 창문의 블라인드를 뚫고 나오는 광선과 뒤섞여 전시된다.
영화 &lt;나인 하프 위크&gt; 스틸컷 / 이미지 출처. 다음영화
킴 베이싱어의 뛰어난 ‘몸사위’와 센슈얼한 촬영으로 완성된 이 스트립 시퀀스는 감독 애드리안 라인의 에로티시즘의 미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시이다. 그는 후반 작품 <언페이스풀>에서도 비와 음악, 그리고 한 연인(의 육체를)을 비슷한 방식으로, 즉 아찔할 정도로 음탕하지만 동시에 모던함과 우아함을 포기하지 않는 그만의 스타일로 재현했다. 올해는 <나인 하프 위크>가 제작된 지 무려 40년을 맞는 해이지만, 이 영화의 매혹적인 육체만큼은 세월의 기미가 없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