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신발 그림들은 애정 결핍에 따른 페티시즘의 산물이었다

[arte] 김동훈의 고흐로 읽는 심리수업
고흐는 파리에 있던 1886년 이후 신발을 소재로 여러 편의 정물화를 그렸다. 일부 연구가들은 고흐의 신발에 대한 애착을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주장한 페티시즘(fetishism, 물신성)으로 해석한다.

신발 페티시즘

프로이트에 따르면 부모와 떨어져 불안을 겪는 아이는 부모의 신발을 보면서 안도하게 된다. 신발은 부모가 근처에 있거나 곧 돌아온다는 증표다. 밖에서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엄마의 신발부터 확인한다. 신발이 있으면 마음을 놓는다. 신발을 통한 안정이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된다면 신발은 결핍된 대상의 대체물일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신발이 ‘페티시(fetish)’이며, 신발을 향한 욕망이 ‘페티시즘’이다. 이 욕망이 극단으로 가면 성적 환상의 도구가 될 수 있다. 페티시즘은 어떤 대상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인 반면, 깊은 불안에 대한 일시적 안정이란 점에서는 생필품과도 같다.
반 고흐 「신발」(1886)
반 고흐 「신발 세 켤레」(1886)
이제 고흐가 그린 신발들이 이런 페티시즘인지 살펴보자. 「신발」(1886)과 「신발 세 켤레」(1886)에는 목이 긴 구두들이 있다. 모두 낡고 닳았는데 특히 화면의 중앙에 세 켤레 중 한 짝이 뒤집혀 있다. 1년 후에 고흐는 새로운 「신발 한 켤레」(1887)를 그렸다. 한쪽은 위를 향하고 다른 한쪽은 아래를 향하고 있으며, 뒤집힌 신발 밑창은 중앙에 성난 아기 피부처럼 오돌토돌 돋아져 있다. 제대로 놓여 있는 한쪽 신발은 여기저기 긁힌 자국이 있고 끈은 풀려 있다. 그나마 오른쪽 아래에는 서명과 제작 연도가 푸른 바탕에 선명하다.
반 고흐 「신발 한 켤레」(1887)
파리를 떠나 아를에서 그린 「신발」(1888)이나 정신 발작을 일으키며 그렸던 「가죽 나막신」(1889)도 힘겨운 시간들을 견디며 걸어온 상흔이 느껴진다. 물감을 두껍고 무거운 필치로 표현한 고흐의 신발 작품들은 흠집과 때가 묻은 그 표면에서 삶의 무게와 아픔이 보인다.
그런데 이 신발들은 어린 시절 고흐의 불안을 잠재웠을 것 같지 않다. 분명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엄마의 신발도 아니며 목사였던 아버지의 신발도 아니다. 고흐가 하필이면 부모의 것이 아닌, 노동자 또는 농부의 신발을 무슨 이유로 그렸는지가 무척 궁금해진다.
[왼쪽] 반 고흐 「신발」(1888) [오른쪽] 반 고흐 「가죽 나막신」(1889)

“네 신발을 벗으라”

고흐가 동생과 주고받은 편지에는 신발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타난다. 신발에 대한 편지가 무려 서른네 통이나 된다. 아쉽게도 서신 왕래는 열아홉 살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보다 이전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신발에 대한 첫 이야기는 1875년 스물두 살에 쓴 편지에 나타난다. 고흐는 밀레의 작품을 보았을 때의 체험을 테오에게 전하는데, 어디선가 다음과 같은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고 말한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발에서 네 신을 벗으라.”
(구약성경 「출애굽기」 3장 5절에서)

이 편지에서 고흐는 세상의 욕심을 버린 사람으로서 밀레를 존경하고 있다. 이후 다른 편지 여러 곳에서 “네 신발을 벗으라.”는 문구를 썼다. 하지만 고흐는 신발의 망령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다. 계속해서 신발 관련 에피소드를 전하기 때문이다.1876년 몇 개월 전 공교롭게도 발목이 부러진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고흐는 영국 소재 학교에 취직했을 때의 일을 전한다. 그는 학생들에게 안데르센의 <빨간 신발>과 <성냥팔이 소녀>, 그리고 <어머니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들려주었다. ‘빨간 구두’ 또는 ‘분홍신’이라고도 번역되는 <빨간 신발>은 일종의 ‘잔혹동화’다.

주인공 카렌은 빨간 신발을 너무 좋아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의 비난과 할머니의 꾸지람을 들었지만 예쁜 구두를 신으려고 안달을 했다. 무도회 초청을 받은 카렌은 마침내 그 신발을 신고야 만다. 하지만 빨간 신발에 마법이 걸려 주인공은 살갗이 벗겨져 피가 흐르면서도 신발을 벗을 수 없다. 잠시도 쉬지 못한 채 고통스럽게 춤을 추어야 했는데 발목이 잘린 후에야 그 무서운 춤을 멈출 수 있었다. 고흐는 빨간 신발을 욕망하는 주인공과 엄마의 사랑에 집착하는 자신을 동일시한 것 같다. 또한 그 신발을 탐하면 테오처럼 발을 쓰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런데 <성냥팔이 소녀>에서 주인공은 신발을 벗은 채 맨발로 걸어 다닌다. 프로이트 식으로 본다면 “네 신발을 벗으라.”는 신의 말씀은 고흐의 초자아가 되어 내면에서 명령했을 것이고, 엄마의 사랑은 자신의 발목을 부러뜨릴 ‘빨간 신발’이기 때문에 추운 겨울에도 당당하게 맨발의 ‘성냥팔이’로 살아가라 했을 것이다. 고흐는 근사한 신발에 눈이 끌릴 때마다 또다시 자신을 억압하며 “네 신발을 벗으라.”는 내면의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고흐는 갖고 싶지만 충족될 수 없는 엄마의 사랑을 아예 포기하면서 엄마의 대체물인 신발을 벗어 던졌다. 그 결과 이제 그의 편지 내용은 맨발에 집중된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주님으로부터 온다. 그는 네 발이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네 지킴이가 잠들지 않게 하시리.
―고흐의 편지(1876년 10월 3일)에서

엄마를 향한 양가적 감정

고흐의 전기 작가들에 따르면, 독서광이었던 고흐는 앞에서 언급한 안데르센의 세 동화 중 특히 <어머니 이야기>에 광적으로 탐닉했다. 주인공 어머니는 아이의 삶이 너무나 비참할 것이라고 여겨 아이를 사랑한 나머지 차라리 죽음의 존재에 맡긴다. 고흐는 어린이들을 만날 때마다 이 끔찍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릴 때부터 자신과 동일한 이름을 먼저 가졌던 형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고 그 형의 무덤 앞에서 실성한 듯 앉아 있는 엄마를 자주 보았다. 그 엄마에겐 따스함이 없었고 원망 섞인 차가운 눈빛만이 가득했다. 어린 고흐의 마음에 자신도 형처럼 죽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가 엄습했다.

고흐가 외지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병상에 있을 때조차 어머니는 다른 형제들을 방문하면서도 자신은 찾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고흐의 추억이 담긴 기념품들과 그림들도 쓰레기처럼 버렸고 아들이 새로 보낸 작품들도 아무렇게나 두었다. 이렇듯 고흐를 매정하고 모질게 대했던 어머니는 고흐가 죽은 후 그 명성이 높아졌을 때에도 아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고흐는 <어머니 이야기>에서 아이에 대한 엄마의 방치를 마치 아이에 대한 엄마의 사랑인 것처럼 읽고 싶었다. 고흐는 이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버린 엄마를 애써 옹호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고흐의 마음은 편했다. 엄마의 부족한 사랑 탓에 엄마를 미워하면서도 그것마저 엄마의 사랑 때문이라는 고흐의 자위가 참으로 서글프다.

엄마에 대한 양가적 감정 때문에 이후 십여 년 동안 고흐의 편지에는 신발과 발에 대한 언급이 계속되었다. 결국 고흐의 신발 작품은 프로이트의 주장처럼 결핍에 대한 페티시즘적 성격이 분명 나타난다. 어찌 보면 불행과 고통으로 점철된 고흐의 인생에서 신발 또는 그 거부에 대한 집착은 그의 삶에 독특한 힘을 발휘했다. 특히 신발을 대상으로 파리에서 정물화를 그리면서 고흐는 다채로운 색과 빛에 집중하는 당시 인상파의 경향에 저항하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거친 현실을 보여 주었다.
반 고흐 「가죽 나막신」(1889)
하지만 1887년 이후 정물화 속에 고흐가 벗어 던진 신발들은 하나같이 낡아서 색까지 바랜 채 덩그러니 놓여 있다. 왠지 활력을 잃은 것 같아 아슬아슬하다. 그래서일까? 죽기 1년 전에 그린 「가죽 나막신」(1889)은 벗은 지 오래되어 말라빠진 것처럼 딱딱해 보인다. 그 신발 어디에서도 부모의 대체물이나 어떤 욕망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신을 벗고 맨발이라는 종교성으로 그것을 보호하려고 했지만 그 종교성은 초자아에 불과했다. 그 억압으로는 자신의 고된 삶을 버틸 수 없었다. 삶의 의욕을 상실했다. 오히려 “안정을 보상하는 신발을 신고”(신약성경 「에베소서」 6장 15절) 사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적어도 그 대체물은 불안에 대한 방어기제로 작용하여 마음을 안정시키고 삶의 의욕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결핍된 사람에게는 삶의 의욕을 위해서 그 대체물이라도 필요하다.

받고 싶은 사랑이 부족할 때, 우리는 그 상대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하게 되는 양가성을 경험한다. 애증은 그를 아직도 욕망한다는 증거다. 만약 더 이상 그런 양가적 욕망마저 없다면 원하는 만큼의 사랑을 받지 못했을 때 자신을 자학하고 모든 의욕도 사라질 뿐이다. 고흐가 엄마를 향해 양가적 감정을 반복하면서 그리워했듯 그 양가성은 험한 세상을 버틸 힘이 된다.우리에게 삶의 의욕을 주는 빨간 신발은 무엇일까? 발을 못 쓰게 될 정도는 아니고 신나게 춤을 출 수 있는 딱 그 한도까지만 눈부시게 빛나는 ‘빨간 구두’를 신어 보자. 하지만 언제까지 대체물에 집착할 수만은 없다. 우리의 목표는 대체물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다. 신발의 물신성을 넘어선 고흐였다면 오히려 ‘가죽 나막신’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어머니를 향해 자신이 이제야 사랑하겠다고 소리쳤을 것이다. 아마도 그때 고흐가 그린 신발은 부드럽고 포근한 빨간 색이지 않았을까?

김동훈 인문학연구소 ‘퓨라파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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