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산문집 '허송세월'… "저녁에 노을을 들여다보면 나는" [서평]
입력
수정
김훈 산문집"핸드폰에 부고가 찍히면 죽음은 배달상품처럼 눈앞에 와 있다." (김훈, '늙기의 즐거움')
늙어감의 즐거움과 죽음에 대한 통찰
덜어내는 글쓰기의 미학 담아
단문과 미문의 대가로 꼽히는 소설가 김훈(76)이 산문집 <허송세월>을 냈다. 어느덧 여든에 가까워진 작가는 생과 사의 경계를 헤매고 돌아온 경험담부터 투병생활, 주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치열한 '허송세월'을 담아 쓴 45편의 글을 모았다.이번 산문집엔 늙음과 죽음을 바라보는 노(老)작가의 통찰이 돋보인다. 형뻘 되는 벗의 화장장에 다녀온 후 쓴 '재의 가벼움'에서 김훈은 당시의 단상을 이렇게 기록했다.
"뼛가루는 흰 분말에 흐린 기운이 스며서 안개 색깔이었다. 입자가 고와서 먼지처럼 보였다. 아무런 질량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중략) 명사라기보다는 '흐린'이라는 형용사에 가까웠다. 뼛가루의 침묵은 완강했고, 범접할 수 없는 적막 속에서 세상과 작별하고 있었다." ('재의 가벼움')
그는 화장장의 뼛가루를 바라보며 "가볍게 죽고, 가는 사람을 서늘하게 보내자"며 "이 가벼움으로 삶의 무거움을 버티어 낼 수 있다"는 깨달음을 전한다.심혈관계통의 질환으로 크게 앓았다는 김훈은 말 그대로 "신체 부위와 장기마다 골병이" 든 몸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어떤 것인지 자조한다. 그리고 뼛가루로 사그라들기 전 어떤 유언을 남길 것인지 고심한다. 그러면서도 호수공원 벤치에 앉아 햇빛을 쐬며 삶의 생명을 노래한다. "허송세월하는 저녁에 노을을 들여다보면 나는 시간의 질감을 내 살아 있는 육신의 관능으로 느낄 수 있고, 한 개의 미립자처럼 또는 한 줄기 파장처럼 시간의 흐름 위에 떠서 흘러가는 내 생명을 느낄 수 있다."('허송세월')
시대의 문장가로서 그에게 평생의 과제였던 글쓰기에 대한 생각도 내놓는다. '조사 '에'를 읽는다'에선 문장의 논리적 기둥을 이루면서도 문장 안에 자유의 공간을 유지하는 '에'의 역할을 조명한다. 김훈은 '덜어내는 글쓰기'의 어려움과 중요성도 강조한다."쓰이기를 원하는 것들과 남에게 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속에서 부글거리는 날에는 더욱 문장의 고삐를 단단히 틀어쥐어야 한다. 이런 날에는 형용사와 부사가 끼어들고, 등장인물의 말투가 들뜨고 단정적 종결어미가 글 쓰는 자를 제압하려고 덤벼든다." ('형용사와 부사를 생각함')
책은 늙어 가는 일의 즐거움을 논하는 글로 운을 떼어, 도로변 투명 벽에 부딪쳐 죽는 새들과 철모를 남기고 간 옛 병사를 향한 헌사로 닫는다. 원로 작가의 개인적인 일상과 상념이 그의 명료하고 섬세한 문체로 생명력을 얻어 마음에 파고든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