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맨정신으로 취하게 하는 행님들의 인간찬가

[arte] 이재현의 탐나는 책

하마구치 류스케, 노하라 다다시, 다카하시 도모유키
이환미 옮김 (2022, 모쿠슈라)
지극히 강박적으로 성실한, 술 한잔하고 싶은 작가
최근 편집한 김기태 작가의 첫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친구 A가 읽고 이렇게 카톡을 보냈다.

A: 기태형이랑 술 한잔해야겠다
나: 뭐가 제일 좋아
A: 표제작이랑 <롤링 선더 러브>
나: 그거 진짜 재밌어서 증정용 소책자에도 넣었는데 좋다니까 너무 좋네
A: 그니까 술 한잔이나 주선해줘 행님으로 모실라니까▶▶▶[관련 리뷰] 젊은 소설가 김기태 "소설을 쓰면 무언가 해소되는 느낌"

▶▶▶[아르떼 프리미엄 인터뷰] "통속성 놓치고 싶지 않아 … 현실적인 소설도 충분히 문학적일 수 있어"

이제 와 생각해보니 A는 그 소설들의 어떤 점 때문에 ‘행님’이라고 부르기로 결심했던 것일까? 나는 묻지 않았다. 일단 이 책이 좋다니까 기분이 한껏 좋았고, 한번 김기태 작가와 술을 마신 내게 A의 부탁이 간절하게 다가오지 않았으며, 나의 또 다른 행님이 떠올라 상념에 젖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하마구치 류스케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처음 본 날, 새해 첫 영화라는 산뜻한 의미부여가 무색하게 마지막에서 줄줄 눈물을 흘렸다. ‘이건 사기야, 사기라고’ 생각하며. 영화관에서 그렇게 줄줄 운 적은 딱 두 번이었고, 다른 하나는 <7번방의 선물>이다. 그때도 ‘이건 사기야, 사기라고’ 생각했지만 <드라이브 마이 카>와는……

때때로 작가라는 호칭도 잘 어울리는 영화감독들이 있다. 이를테면 <마스터>의 폴 토마스 앤더슨이나 <트랜짓>의 크리스티안 페촐트, 거의 매번의 홍상수, 그리고 하마구치 류스케. 좋은 작가의 책을 탐내듯이, 또다른 작가로서 영화감독들의 책을 탐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게 이들의 공통점은 행간이 많다는 데 있다. 행간이 많다는 건 말의 많음을 전제한다. 대화는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것이지만, 동시에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하다. 매 장면마다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인물들이 충돌한다.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또는 자기도 모르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는지.
하마구치 류스케, 노하라 다다시, 다카하시 도모유키 &lt;카메라 앞에서 연기한다는 것&gt; 이환미 옮김 (2022, 모쿠슈라) / 이미지 제공. 이재현
영화가 부리는 그런 마법 때문일까, 요근래 각본집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마음에 와닿은 영화의 이면을 파헤치고 싶은 순정한 욕망을 이끌어내는 책들. 영원히 소장하고 싶은 장면과 대사, 영화를 둘러싼 서브텍스트 들. 그중 특히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켰던 각본집은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해피 아워'의 각본집인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다는 것>이었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평온했던 네 친구의 일상 가운데 ‘준’의 이혼소송 소식이 폭탄처럼 떨어진다. 그간 준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남편은 이혼을 원치 않지만 자신이 소송을 걸었다는 고백도 함께. 와중에 속내를 더 깊이 털어놓는 친구가 따로 있다는 사실과, 각자가 서로에게 품고 있던 아쉬움이 밝혀지며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네 친구 각자가 주변의 남편, 동료, 친구들과 맺고 있던 관계의 실밥이 차례로 터져나간다. 가까운 이에 대한 의심이 사실로 밝혀지고, 충격받은 사람 앞에 사죄는커녕 관계를 끝내자는 충격적인 발언이 이어진다.
영화 &lt;해피 아워&gt; 스틸컷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하마구치 류스케의 인장이라고 할 만한 질문은 이것이다. 두터운 시간과 함께 쌓인 믿음이 배신으로 깨지고 나서도 관계는 지속될 수 있을까? 그러나 그의 관심이 단순한 가십에 그치지 않는 것은, 정말로 그 끝 간 데에서 다시 일어서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무엇을 더 알아야 하는지 간절하게 묻고, 그 진실이 야기할 상처까지 각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에게 ‘부끄러움’은 있어도 ‘아첨’과 ‘젠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카메라가 가차 없는 음미의 기계임을 이해하고 그 앞에 섰을 때, 결국 자신에게 밀려오는 의문은 ‘진정으로 부끄러운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좀 더 파고들자면, 사회의 시선을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어서’ 진정한 부끄러움은 무엇인지 의문을 갖는 겁니다. 여기서 요구하는 것은 부끄러움을 떨쳐 버리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부끄러움에 의해 스스로를 지탱하고 돕는 것입니다. 이때 부끄러움은 역할과 자신을 분리하지 않고, 가장 깊숙한 영역에서 서로를 강하게 연결해주는 게 아닐까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다는 것> 중에서

<해피 아워>는 하마구치 류스케와 그의 동료들이 일반인과 함께한 연기 워크숍을 영화로 발전시킨 사례다. 그에 따라 하마구치 류스케가 어떤 생각으로 <해피 아워>를 기획했고 찍게 되었는지 1장 ‘영화 <해피 아워>의 방법’에 세세히 적혀 있다. 그 연출론을 읽는 동안 감동하고 말았던 건, 그가 정말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적당히 만족하고 그칠 수도 있는 지점에서 그는 이게 최선인가? 부족한 것은 무엇이고, 더 나아질 수는 없는지 묻고 또 묻는다.

서브텍스트 7
가자마/요시에
가자마와 요시에의 서브텍스트. 각본상의 ‘백그라운드 스토리’를 그렸다. 넉 달 넘게 촬영 일정이 비게 된 두 연기자를 위해 썼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다는 것> 중에서

연출론에서는 하마구치 류스케라는 작가를 더 신뢰하게 되었다면, 서브텍스트에 이르러서는 완벽도에 대한 강박에 소름이 돋았다. 좁은 의미로 예술을 탁마하는 경지 이상의,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순례길을 떠나는 성자를 바라보는 기분이라고 할까. 주연들의 이입뿐만 아니라 조연들의 비는 시간과 감정선을 위해 본편 볼륨만큼의 서브텍스트를 작성하는 그 성실함에 완전히 질려버렸고, 그럴 수 있어 기뻤다. 이 정도로 열심히 파고드는 사람이 있다니, 그가 탐사하는 인간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어 영광이라고……
영화 &lt;해피 아워&gt; 스틸컷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완벽에 가깝게 작품을 세공하고 조탁하는 작가들을 장르를 막론하고 고대하고 있다. 그리고 다행히, 우리가 그렇게 바라는 그 ‘행님’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스스로에게 질문을 거듭하며 무한한 정신의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여정을 마치고 다음 여정을 나서기 전 잠깐 들른 그들에겐 긴히 자리를 청해야 하리라. 나는 술은 잘 못하지만 술자리만큼은 무척 좋아한다. 부끄러움을 떨치고 솔직한 면모를 드러내도 좋은 순간이기에. 그렇지만 술이 없어도 그 해방의 시간은 가능하다. 우리를 맨정신으로 취하게 하는 행님들의 인간찬가를 바로 지금 보고 읽을 수 있으니까.

이재현 문학동네 국내문학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