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스타가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하듯 커피를 만드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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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조원진의 공간의 감각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에는 어두운 거리 홀로 불을 밝힌 ‘다이너(Diner)’ 주방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주방 공간을 소비자에게 그대로 드러내는 오픈키친이 이 그림 속에 등장하는 다이너에 이미 도입된 개념이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오픈키친을 도입한 것은 파인 다이닝 ‘스파고(Spago)’라고 할 수 있다. 1982년 오너 셰프 울프강 퍽(Wolfgang Puck)이 문을 연 이 레스토랑은 홀 어디에 앉든 투명한 유리창으로 모든 조리과정을 볼 수 있었다. 실베스터 스탤론, 조지 루카스, 스티븐 스필버그 등 할리우드 유명 인사들이 단골로 찾을 정도로 인기를 끌던 이 레스토랑은, 미국 전역으로 오픈키친 개념을 퍼뜨리며 일선 레스토랑의 ‘스파고화(Spagoization)’를 이끌었다.커피를 취급한 다이너부터 에스프레소 머신을 올려둔 현대적인 카페까지 대부분 제조 공간을 드러낸 형태를 갖췄으니, 카페 역사에서 오픈키친 개념이 도입된 시기를 논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스파고와 같이 제조과정의 투명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의 ‘오픈 키친’을 말한다면, 스페셜티 커피를 중심으로 한 커피 제3의 물결 시대에 그 개념이 본격적으로 도입됐다고 볼 수 있다.
펠트커피 청계천점
어디에서도 커피 제조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오픈형 바(bar)를 설계한 스웨덴 요한앤뉘스트롬, 미국 로스앤젤레스 베니스비치에 문을 연 인텔리젠시아 커피의 매장이 있다. 기존의 매장들이 소비자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설계를 해 제조공간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에 반해, 이 매장들은 바리스타가 마치 무대 위에서 멋진 공연을 선보이듯 커피를 제조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이후 자칫 잘못하면 고객의 동선이 바 안으로 섞여 들어갈 만큼 그 경계가 아슬아슬한 ‘오픈 바’ 구조가 스페셜티 커피 업체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바의 내부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을 넘어서 커피를 다루는 보다 섬세한 과정을 오픈한 곳도 있었다. 1995년 노스캐롤라이나 더럼에 문을 연 카운터컬처 커피는 플래그십 스토어 수준의 트레이닝 공간만을 운영하며, B2B 중심의 영업으로 그 규모를 키웠다. 이 트레이닝 공간은 바리스타뿐만 아니라 원두를 납품받는 클라이언트와 일반 소비자까지 이용할 수 있었다. 나아가 블루보틀과 모모스커피는 생두 창고나 대형 로스터기가 설치된 공간이 공개된 카페 공간을 선보였다.스페셜티 커피 시대에 이르러 카페는 제한된 공간에서 최대의 매출을 끌어내야 하는 역할을 내려놓게 됐다. 오히려 공간을 통해 모든 제조과정을 공개하거나 자신들이 가진 지식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커피 제조 과정의 ‘추적 가능성’에 무게를 둔 새로운 전략을 펼쳐나갔다. 소비자를 매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묶어두지 않는 이러한 영업방식은 커피업계의 외연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명확한 이력을 가진 커피는 잘 설계된 레시피를 따라 그 커피를 납품받는 다양한 상업 공간에서 꽃을 피웠다. 또, 소비자와의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커피에 대한 지식을 나누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스페셜티 커피 애호가들을 중심으로 한 홈카페의 시장의 성장이 촉발됐다.
2015년 창전동에 문을 연 ‘펠트커피 쇼룸’은 스페셜티 커피 시대의 지향점을 보여주는 새로운 공간이었다. 커피업계 최초로 선보인 이 ‘쇼룸’에는 하얀 벽과 에스프레소 머신이 올려져 있는바, 벽 따라 설치된 붙박이 의자가 전부였다. 당시에는 저녁 늦게까지 문을 여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쇼룸은 오후 6시까지만 문을 열어두었다.스페셜티 커피 업체는 패션 브랜드와 같이 계절에 따라 새로운 제품을 선보인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브랜드 철학을 바탕으로 개성을 표현해내는 것도 패션 업계와 맥락을 같이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의구심을 품었던 펠트커피의 첫 쇼룸은 머지않아 적지 않은 카페들이 그 형태를 따라 할 정도로 성공적인 모델이 됐다. 전국 곳곳에 펠트 쇼룸의 인테리어와 유사하게 내부를 꾸민 매장이 여럿 등장 했고, 턴테이블을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까지 그대로 틀어놓는 곳도 있었다.창전동 쇼룸을 시작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펠트는, 광화문과 청계천, 도산공원, 판교 일대에 매장을 열었다. 각각의 공간은 이제는 문을 닫은 창전동 쇼룸의 정체성을 이어받았는데, 상상력을 더해 주어진 공간을 확장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주목을 받았다. 네 개의 큰 문이 열리면 문 앞의 광장과 연결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청계천점은 이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매장이다.내부는 오페라 극장을 연상케 하는 붉은 커튼을 둘렀고, 천장에 달린 커다란 한 쌍의 웨스턴 일렉트릭 혼(Horn)에서는 공간을 울리는 청량한 음악이 울려 퍼진다. 마치 근사한 오페라 극장을 연상케 하는 이 ‘무대’에 바리스타가 오르고, 손님들은 잘 준비된 한 편의 ‘커피’를 즐기게 된다. 정교하게 마감한 목재 의자는 언제든 위치를 바꿀 수 있다. 덕분에 누군가는 바리스타가 펼치는 공연에 빠져 있지만, 누군가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다.매장을 무대로 만든 펠트의 시도는 또 다른 성공의 모델이 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통유리로 된 매장을 부러 커튼으로 둘러싼 곳도 있을 정도였다. 커피업계에서 종종 목격하는 공간의 ‘펠트화’의 모습은 다양하다. 단순히 화제가 된 공간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가져가는 곳도 있지만, 그 영향으로 또 새로운 공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레스토랑의 스파고화는 셰프를 부엌에 숨어있는 존재가 아닌, 음식을 창조하고 소비자와 소통하는 스타로 만들었다. 이것이 외식 문화를 발전시켰는지 악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공고했던 주방의 벽을 무너뜨린 과감한 시도가 혁신을 일으켰다는 점은 분명하다.이와 비슷하게 펠트를 비롯한 스페셜티 커피 업체들의 새로운 시도는 카페가 가진 공간의 한계를 무너뜨렸다. 덕분에 한 잔의 커피가 완성되기까지 가치사슬로 엮여있는 모두가 과정을 공유하고 함께 즐길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제3의 물결이 일으킨 제3의 공간이 우리를 제4의 물결로, 제4의 공간으로 이끌고 있다. 커피 산업이 더 오래 지속가능 할 수 있도록, 커피의 세계가 가진 기쁨과 행복이 더 커지고 깊어질 수 있도록.
조원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