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으로 묻다, 삶의 고통 잊으려 환희의 기억까지 지울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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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최승연의 뮤지컬 인물 열전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2024년 5연으로 돌아왔다. 팬들 사이에서 ‘어햎’으로 불리는 <어쩌면 해피엔딩>은 2016년 초연을 시작하여 대표적인 대학로 중소극장 뮤지컬로 성장해 왔다. 공연은 특유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현악 위주의 넘버들 외에도 극 안의 여러 요소, 가령 오래된 재즈 음반, 올리버의 화분, 제주도의 반딧불이 등을 매력 포인트로 확장하며 관객을 사로잡았다. 그사이 초연 배우인 전미도, 정문성은 텔레비전과 OTT 드라마로 활동 폭을 넓히며 전 국민이 아는 배우로 성장했고 김재범, 정욱진은 코믹 연기까지 능수능란하게 해내는 대표적인 뮤지컬 배우가 되었다.
뮤지컬
삶의 환희와 고통을 꿈꾸듯 알게 된 헬퍼봇, 올리버와 클레어
▶▶▶ [관련 기사] 이번엔 ‘어쩌면 해피엔딩’… 뮤지컬 듀오 ‘휴&윌′, 또 흥행 사냥
▶▶▶[관련 리뷰] '창작 뮤지컬의 신화'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은 수작, <어쩌면 해피엔딩>한편, 2024년은 한국의 5연과 더불어 <어쩌면 해피엔딩>의 또 다른 역사가 시작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미 2017년 신스웨이브 제작으로 일본 도쿄 공연을, 2021년에는 상해문화광장 제작으로 중국 라이선스 공연도 마쳤지만 2024년 10월에는 영어 제목 <Maybe Happy Ending>으로 브로드웨이 오픈런 공연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퀘어 웨스트 44번가에 위치한 1059석의 벨라스코 극장에서 공연될 <Maybe Happy Ending>은 초연 대본을 한국어와 영어 두 가지 버전으로 썼던 박천휴와 윌 애런슨 콤비의 뉴욕 리딩 공연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016년 당시 리딩 공연을 본 프로듀서 제프리 리처드의 제작으로 2020년 애틀랜타 얼라이언스 씨어터 코카콜라 무대에서 트라이아웃 공연을 완료하는 등 약 8년간의 제작 기간을 거쳐 탄생한 것이다.
이렇듯 한국 중소극장 창작뮤지컬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는 <어쩌면 해피엔딩>의 매력은 무엇일까. 정교하게 다듬어진 대본과 정서적인 몰입도를 높이는 넘버의 화학적 결합, 상용화된 로봇과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차로 운전해서 갈 수 있다는 근미래적 상상력, 로봇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연극적인 놀이성, 깔끔하게 구현된 무대 영상 등은 분명한 미덕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쩌면 해피엔딩>을 이끄는 힘은 올리버와 클레어라는 두 인물에게 있다. 그들이 보여주는 찬란하고 아이러니한 이야기는 삶에 대한 본질적인 감각을 일깨운다.낡고 늙고 버려진 그들
그들의 이야기가 찬란한 건 올리버와 클레어가 ‘함께 하는 삶’의 가치를 발견하는 과정이 그저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그들의 모습은 차라리 안타깝다. 그들은 곧 폐기될 낡은 로봇이다. 과거 인간을 도와줄 때 가장 행복한 ‘헬퍼봇’으로 탄생했지만 현재는 인간에게 버려져 남은 삶을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내는 중이다.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것은 고물 로봇들의 아파트와 충전기뿐이다.
물론 올리버는 작은 화분 친구를 벗 삼아 별문제 없이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겐 오래된 재즈 음반 수집 취미도 있다. 이런 그의 일상은 매일 같은 루틴을 반복하는 기계적이고 규칙적인 흐름으로 유지된다. 하지만 이 일상에서 두드러지는 올리버 특유의 쾌활함과 명랑함에는 왠지 모를 깊은 외로움이 묻어 있다. 제주도에 있는 제임스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 여전히 믿고 있는 올리버의 상태는 언제든 깨질 준비가 되어 있는 살얼음판처럼 위태해 보이기까지 하다. 윌&휴 콤비는 이번 브로드웨이 공연을 위해 한국 버전에는 없는 설정 몇 가지를 더했는데, 그중 하나가 올리버의 화분이다. ‘제임스와 함께 살 때 키웠던 큰 식물의 가지를 옮겨 심은 것’이라는 설정은 올리버가 제임스의 부재를 작은 화분으로 견디고 있음을 명확히 알려준다. 클레어는 올리버보다 현실적이다. 그녀는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 호기심 많고 사교적인 것처럼 보이는 클레어는 사실관계의 무용함을 익히 잘 알고 있는 상태다. 주인 부부가 서로에게 소원해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인간에게 영원한 마음은 없다는 사실을 학습한 탓이다. 그녀는 스스로 ‘버려진 존재’임을 잘 알고 있으며, 따라서 삶이 중지될 때까지 현재에 집중하려 노력할 뿐이다. 이런 그녀가 원하는 것은 제주도의 반딧불이를 보러 가는 것이다. 딱 두 달간 아름다운 빛을 내고 죽는 반딧불이는 클레어의 ‘삶’을 위로해 줄 것만 같기 때문이다.
삶의 유한함을 껴안기
이런 올리버와 클레어는 우연히 만나고 또한 변화한다. 규칙적인 일상을 깨고 들어온 클레어를 통해 올리버는 결국 ‘관계의 무용함’을 학습하게 되었고, 순진하고 엉뚱한 올리버를 통해 클레어는 ‘함께 하는 것의 즐거움’을 믿게 된다. 그리고 그다음은, ‘서로 사랑하면 안 된다’는 그들 스스로가 만든 금기를 깨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곧 소멸할 최후를 껴안고 시작된 것이기에 지극히 제한적 일 수밖에 없지만, 또 그만큼 섬세하게 타오른다. 서로의 몸을 만지며 ‘함께 하는 감각’을 처음으로 경험한 그들은 곧 모든 순간을 공유함으로써 과거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그들은 곧바로 새로운 차원의 고통에 던져진다. 상대방의 고통을 고스란히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함께 함으로써 알게 되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슬픔을 경험한다. 삶의 유한성을 ‘슬픔’으로 인지하는 새로운 감각을 갖게 된 그들은 고통을 참기 어려워 원래대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특히 서로가 가장 사랑했던 순간을 초기화하여 남은 시간을 덤덤하게 살아내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어쩌면 해피엔딩>의 ‘엔딩’은 그들의 마지막 선택을 한 방향으로 규정하고 단정 짓지 않는다. 단,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함께 함으로써’ 사랑과 행복과 슬픔을 알게 된 그들은 망각보다 상실의 아픔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올리버는 다시 만난 클레어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으며, 클레어 역시 올리버의 방을 왠지 익숙하게 느끼는 것 같다. <어쩌면 해피엔딩>의 비전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삶의 유한함을 껴안고 그 이후를 살아내려는 그들의 미래는, 그래서 해피엔딩일 것이다. 최승연 뮤지컬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