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지않아 우린 정말 쉴 수 있을까? 진짜 어른들의 이야기, '바냐 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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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상우의 아주 사적인 연극일기성균관대 인근 명륜동 후미진 골목에 있는 안똔 체홉 극장은 체홉의 작품을 위한 전용 극장이다. 배우 뿐만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도 체홉 작품을 분석하는 워크샵을 진행하고, 주로 체홉의 4대 장막을 중심으로 공연을 올린다. 이번에는 그곳에서 개인적으로 체홉의 희곡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바냐 삼촌’을 관람했다. 바냐 삼촌은 체홉이 이전 작품인 ‘숲 귀신(1888)’을 개작한 것으로 비슷한 배경 설정인 ‘숲 귀신’에서는 주인공의 자살로 끝을 맺지만 우리의 바냐는 끝까지 삶을 살아가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내용은 이러하다. 정년 퇴임한 세레브랴꼬프 교수는 그의 젊은 부인 옐레나와 함께 시골 영지로 내려온다. 그 영지는 세상을 떠난 첫 번째 아내의 소유인데 그곳에는 전처의 어머니와 오빠 바냐, 젊은 딸 소냐가 살고 있다. 그리고 교수의 통풍 치료를 위해 마을 주민인 아스뜨롭 의사가 와있다. 역시 체홉 작품답게 누구 한 명에게만 초점이 맞춰지지 않고 모든 인물들에 대한 서사가 충만하다. 바냐는 교수의 부인 옐레나를 연모한다. 소냐는 아스뜨롭 의사를 열렬히 사랑한다. 하지만 아스뜨롭의 마음 역시 옐레나에게 가 있다. 어느 날 아스뜨롭과 옐레나의 키스 장면을 바냐가 목도하고 만다.이런 내용이 어찌 재미없을 수 있겠는가. 사실적으로 그려지는 인물들의 심리를 팝콘각으로 지켜보다 보면 두 시간이 훌쩍 넘어간다. ‘벚꽃동산’과 마찬가지로 체홉은 이 작품에서도 이기적인 교수를 통해 당대 귀족의 무능력과 염치없음을 꼬집는다. 바냐는 영지에서의 수입으로 늘 세레브랴꼬프 교수에게 생활비를 보내왔는데, 이 작자가 갑자기 바냐와 소냐의 삶의 터전인 영지를 팔아 투자 상품에 넣자는 제안을 하는 바람에 결국 바냐의 설움과 분노가 폭발한다.
체홉 희곡 분석 탁월한 안똔체홉학회(전훈 연출)
오, 불쌍한 바냐. 제대로 쉬어본 적도 없이 일만 했지만 합당한 대우를 받지도 못했고, 사랑에도 실패한 그를 위로하는 것은 소냐 밖에 없다. 이번에도 역시 관객들은 바냐의 모습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일하고 또 일해도 나아지지 않는 이놈의 세상, 취미도 연애도 젬병, 낙이라고는 없는 인생. 대부분의 인생은 바냐 아니면 소냐이다. 체홉의 작품에서 우리는 여전히 당시와 다를 것 없는 우리를 보고, 우리의 불행을 보며, 역설적으로 위로를 받기도 한다. 뭐니뭐니해도 극을 한층 더 맛깔스럽게 살리는 것은 좋은 배우들의 연기이다. 바냐 역의 조환 배우는 서러운 바냐를 연기하며 후반부터 눈물을 글썽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짠한지 ‘메소드 연기란 저런 것이구나’ 를 느끼게 한다. 그가 ‘벚꽃동산’에서 패기만만하고 영리한 로빠힌을 얼마나 훌륭하게 연기했는지 봤기에 이번 변신은 더 놀라웠다. 아스뜨롭 의사 역의 김진근 배우 역시 유들유들하고 능청스러운 연기가 일품이다. ‘세 자매’에서 둘째 딸 이리나의 남편 역할을 할 때도 느꼈는데 연기가 너무나 자연스러워 체홉의 리얼리즘 작품에 가장 부합되는 배우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재작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국제장편영화상을 받은 일본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도 연극 ‘바냐 삼촌’이 비중 있게 나온다.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연극 연출자 가후쿠는 히로시마 연극제에서 ‘바냐 삼촌’의 연출을 맡게 된다. 연극에는 한국인, 타이완인이 배우로 참여하는 데 알다시피 그 국가들은 일본의 식민지였고, 배경인 히로시마는 일본이 제국주의의 종말을 맞게 된 원폭의 도시이기도 하다.
연출자를 포함하여 누구 한 명 몸 깊숙이 아픔이 새겨지지 않은 이가 없는데 이들이 모여서 바냐 삼촌의 대사를 주고받는 거다. “삼촌, 우린 살아가야 해요. 길고도 긴 낮과 밤을 끝까지 살아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보내주는 시련을 꾹 참아 나가는 거에요. 우리, 남들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기로 해요.” 연습 과정을 통해 가후쿠와 배우들은 '바냐 삼촌'에 점점 몰입하고 마침내 이 연극은 영화 전체에 녹아든다. 지금도 ‘드라이브 마이 카’를 생각하면 ‘바냐 삼촌’ 장면만 떠오른다. 바냐 삼촌이 이렇듯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가지는 것은 비루한 삶일지언정 그것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자는 메시지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살아야죠. 우린 살아야 해요. 무덤 넘어 저 세상으로 가서 말하기로 해요. 우리의 삶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우리가 얼마나 울었고 슬퍼했는지 말이에요." 소냐가 바냐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하는 이 말은 곧 우리에게 건네는 위로이기도 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말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래, 살아가야지. 소냐가 고맙고 다시 장부 정리를 시작하는 바냐 삼촌이 고맙고, 무엇보다 '숲귀신'의 결말을 바냐로 바꾼 체홉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