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이 곧 아이 성적표…어디 다니는지 보면 실력 알죠" [대치동 이야기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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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대치동의 현실…살벌한 학원가“아이 학원 고르는 기준을 딱 하나만 꼽아야 한다면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의 수준’ 같아요. 성적이 좋은 그룹 내에 있는 게 동기부여, 자신감 등 여러모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입장에서도 학습 수준이 높은 반에 더 많은 걸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요.”
'남다른·앞서는' 교육 표방하는 초등 학원들
영어, 저학년 때부터 자유자재로 구사하도록
수학은 창의력 기른 뒤 본격 문제풀이로
문해력, 입시에 직결된다…초등 때 수능3등급 완성
27일 밤 9시반께 강남 대치동 학원가에서 아이의 하원을 기다리고 있던 한 학부모는 이렇게 말했다. 자녀가 강남 소재 초등학교에서 상위 10%라고 소개한 그는 “어떤 학원을 다니는지 보면 그 아이 실력을 가늠할 수가 있다”고 말했다. 다니는 학원의 수준이 아이들 사이에서는 첫 명함이자 성적표가 되는 셈이다.상황이 이렇다보니 학원 입장에서도 고득점 아이들을 모아놓는 것이 중요한 요소다. 공교육 이상의, ‘앞서가는’ 아이들만이 받고 있는 교육을 표방한다. 치열한 레벨테스트로 학생을 선별해 받는 이유기도 하다. 이렇게 모인 우수한 아이들은 또다른 우수한 아이들을 불러 모은다.
특히 초등학교는 사교육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6개의 학년이 시기별로 각각 다른 수요를 가진다. 예컨대 저학년 때는 내신 성적에 상관없이 창의력과 잠재력을 키워주고 싶어 한다면, 고학년 때는 그런 요소를 최소화하고 중학교 입시 경쟁 레이스에 적응할 수 있도록 예습을 하는 식이다.
그래서 중·고교보다도 초등 학원들은 더욱 다양한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다. 한국경제신문이 대치동 초등학생들은 어떤 학원들을 다니는지 들춰봤다.
○영어, 저학년 때부터 자유자재로 구사하도록
저학년의 영어학원은 영어유치원으로 불리는 유아 영어학원의 연장선이다. 보통 초등학교 입학 전 9월에 신청을 받아 10~11월에 레벨테스트를 본다. 대부분 선착순인 탓에 학원의 레벨이 높을수록 신청이 어렵다. 입학 시험을 초반에 보는 학원들은 연습 삼아 응시하는 학생들까지 몰려 홈페이지가 다운되기도 한다.입학 시험은 3점대, 2점대, 1점대 순으로 어렵다. 대치동 영어학원은 1~3점대로 구분되는데, 다니던 영어 유치원에서 배우는 미국 교과서가 2학년 대상이면 2점대 학원에, 3학년 대상이면 3점대 학원에 간다.대표적인 3점대 학원은 피아이(PEAI·Practical English Application Institute)다. 디베이트(토론) 수업으로 유명한 이 학원은 스피킹에 특화돼 있다. 학원 이름처럼 학생들이 깊은 수준의 지식을 이해하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게 목표다.
실제로 25일 저녁에 방문한 학원에서는 초등학생들이 서로 자유자재로 영어로 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토론 수업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발행되는 글로벌 이슈로 수업이 진행된다. 학원은 학생들이 ‘지구 이후 문명’ ‘성격 분석’ ‘선전과 권력’ 등을 주제로 공부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 외에도 렉스김, 엠아이어학원이 3점대 영어학원에 속한다.
2점대 학원으로는 아이스피크 등이 유명하다. 아이들이 즐거워할 수 있는 면학 분위기가 특징이다. 미국 교과서의 영단어를 외우고, 자체 교재와 소설 등을 읽어가는 숙제가 있다. 읽는 양이 많고, 이를 완전히 이해해야 풀수 있는 문제라 숙제를 하는 시간이 긴 편이다. 이밖에도 프라우드7, 그로튼, USC 등이 2점대 학원이다. 초등 3학년부터는 고학년 대상 빅(Big) 영어학원으로 갈아타기 위해 또다른 입학 테스트를 준비한다. 고학년은 수학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시기로 여겨지기 때문에 고학년부터는 부담이 덜한 영어학원을 선택한다.
대표적인 곳이 ILE(I Love English)다. 상위권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형 내신과 문법도 가르쳐 영어 실력을 수능까지 유지하게 한다는 컨셉이다. 초등학생 때는 자체 교재로 수업을 진행하며, 기초 글쓰기부터 논리적인 글쓰기까지 학년별 수업을 진행한다.
국제학교 아이들이나 해외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이안어학원이 인기다. 쓰기 중심 수업이 특징으로 ‘영어 논술학원’처럼 여겨진다. 수업은 리딩 스킬, 어휘, 문법, 기초 작문 등으로 이뤄져 있다. 국내 학교의 내신 수업은 진행하지 않으며, 과제의 난도가 높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편이다. 이 외에도 ILE, 이맥스, 해빛나인 등이 고학년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수학은 창의력 기른 뒤 본격 문제풀이로
수학의 경우 저학년과 고학년의 학습 방법이 다르다. 고학년에 올라가 본격적으로 수학 문제푸리를 시작하기 전에, 기초체력에 해당하는 창의력과 ‘수학머리’를 길러줘야 한다는 것이다. 정형화된 수학 문제뿐만 아니라 경시대회 문제, 도형 관련 문제에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끔말이다.사고력 수학에 강한 학원으로는 CMS가 꼽힌다. 예컨대 나눗셈을 단순 계산으로만 익히는 것이 아니라 교재에 그려진 바둑돌 그림을 통해 직접 나눠보는 식으로 원리를 익히게 돕는다. 단순한 답을 요구하는 문제 풀이를 시키지 않고, 사칙연산의 원리를 파악할 때까지 원리를 적용시키는 법을 돕는다.
초등 입학 전부터 필즈와 소마를 다니다가, 초등에 입학해서는 ‘생각하는 황소’로 빠지는 경우도 많다. 들어가는 것이 어려워 ‘황소고시’라고도 불리는데, 입학보다 실제 학원생활이 더 어려운 것으로 유명하다.
재원생들은 주기적인 단원평가를 치르고 한 학기 기준 점수가 60~70점 미만이면 레벨이 강등된다. 과제 수행 정도가 부진해도 마찬가지다. 학원 측은 “엄격한 학사 관리를 통해 학습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학생들만 수업 대상으로 한다”고 설명했다.
학생들이 압박감으로 이탈하는 경우도 있지만, 여전히 가장 인기가 많은 이유는 다양한 수학 문제를 많이 풀 수 있기 때문이다. 학원은 “자기주도학습만이 수학적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며 "모든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도록 유도한다”고 말했다.
○문해력, 입시에 직결된다…초등 때 수능3등급↑ 완성
초등학생 부모들의 문해력에 대한 관심도 부쩍 커졌다. 교육부가 ‘2028 대입 개편안’에서 논술형 서술형 평가를 확대하겠다고 발표하면서다. 중학생, 고등학생보다 시간적으로 더 여유 있는 초등 시기에 다양한 책을 접하고 글쓰기 능력을 키워주려는 학부모가 많다.저학년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지혜의숲이 인기다. 가정적이고 따뜻한 분위기 때문이다. 딱딱한 수업뿐만 아니라 체험 수업을 제공하고, 친구들끼리 칭찬 릴레이를 하는 시간도 가진다. 꼭 쓰고 공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생각을 열어주는 논술을 표방한다.
학원 같은 분위기를 찾는 부모들에게는 씨앤에이논술이 인기가 많다. 글쓰기에 초점이 맞춰진 게 특징이다. 원고지에 생각을 정리하는 방법부터 시작해 글의 체계를 배운다. 매주 권장도서를 읽고 생각해온 후 원고지에 쓰는 수업을 진행한다.
초1부터 중3까지 다니는 논술화랑은 토론 수업으로 유명하다. 대기가 길어 초등 저학년에 대기를 걸면 최소 반 년이 지나야 입학테스트 연락이 올 정도로 인기가 높다. 초등 1~2학년 때는 논술화랑으로 운영하다가 초등 3~5학년이 되면 역사화랑으로 전환해 사회문화 서적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초등 6학년부터는 수능 위주 수업을 한다.
고학년 학생들 사이에서는 기파랑이 인기가 많다. 학년이 아닌 실력으로 분반한다. 재미보다는 실제 실력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초등 기간 중 수능 언어 3등급 수준 이상을 완성하는 게 목표다. 시험이 많은 편이며, 수업을 따라가지 못할 경우 진급 시험에서 레벨이 강등되는 경우가 많다.
독서논술뿐만 아니라 주요 논제들을 선별해 논리력을 기르고, 어휘 암기를 통해 수능 문학 영역에도 대비한다. NIE(신문 읽기) 활동도 있어 학습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정부의 사교육비 대책에도 사교육비는 매년 사상최대치를 경신하고 있습니다. 사교육을 받은 학생들과 그렇지 않은 학생 사이의 격차도 심화하고 있습니다. 다들 사교육이 문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일까요. 한국경제신문·한경닷컴은 사교육으로 대표되는 대치동의 속살을 살짝 들여다볼 수 있는 '대치동 이야기' 시리즈를 기획해 매주 월요일 게재합니다. 대치동을 긍정적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스템을 모르면 한국 교육의 업그레이드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대치동이 어디인지, 대치동의 왕좌는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그 안에서 살아가는 학생, 학부모, 강사들의 삶은 어떤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대치동 이야기를 써 내려갑니다. 아래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거나 포털에서 [대치동 이야기]로 검색하면 더 많은 교육 기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이혜인 기자 hey@hankyung.com